[정선희의 위드 디자인] 디자이너는 왜 글을 쓰는가?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에스큐브디자인랩 대표

좋은 디자인은 글로 설명 필요 없다
파워포인트 이용 말로 전달 일상화
지식·경험 전달 위한 글의 힘 깨달아

사람마다 글을 쓰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책에서 글쓰기의 4가지 동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는 순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고, 기억되고 싶어서, 둘째는 미학적인 열정,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으로, 셋째는 역사적 충동, 사물의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에 전하려는 욕구로, 넷째는 정치적 목적, 타인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라고 정리했다.

나는 왜 글을 쓰는 것일까? 벌써 13번째 칼럼을 쓰고 있지만, 데드라인이 다가올 때마다 매번 “다음에는 그만둔다고 해야지”라는 생각을 한다. 엄청난 압박과 스트레스다. 그런데도 이번 칼럼에서는 다시 한번 글쓰기의 중요성을 기억하며 초심으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나는 늘 글 쓰는 사람을 부러워했다. 어릴 적 내가 좋아하는 책들의 여자 주인공들은 모두 글을 썼다. 〈작은 아씨들〉의 조이는 글을 쓰면서 당당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았다.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도 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사랑을 얻었다. 〈빨강머리 앤〉은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을 잃지 않는 엄청난 상상력의 힘을 가진 문학소녀였다. 또한 주체적인 여성을 표현하는 작가들은 자신의 시대의 편견에 저항하며 글을 쓰는 여성들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빨려 들 듯 읽었던 〈제인 에어〉의 작가 샬롯 브론테, 〈오만과 편견〉의 제인 오스틴, 〈피터 래빗〉을 쓴 베아트리체 포터까지. 이들을 보며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 글을 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그러나 학력고사 시절을 보낸 나는 글쓰기를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면서 글보다는 시각적으로 개념을 보여 주고 소통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글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야”라는 생각으로 더욱 글쓰기를 무시했다.

디자이너로 일을 하면서 말로 설득하고 발표하는 일이 많았다. 글보다는 말, MS 워드나 훈민정음보다는 파워포인트로 작성하고 발표했다. 말로 설득하는 일은 재밌었고 언제나 시각적인 자료와 함께하는 말에 사람들은 잘 설득당해 주었다. 말은 쉬웠지만 글은 어려웠다. “나는 한국 주입식 교육의 산물이야”라며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지만, 그때그때 넘기며 살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경험과 지식을 어떻게 하나의 자산으로 전달하고 남길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파워포인트로 결과물을 발표하며 프로젝트를 완성하지만, 지식이 제대로 쌓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표를 듣는 사람들 외에는 그 내용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다 충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40대 중반, 교수를 그만두고 미얀마 양곤에서 사회적기업인 프락시미티 디자인(Proximity Designs)에서 서비스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다. 디자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미얀마 직원들과 함께 미얀마 농부들을 위한 스마트폰을 활용한 농업 자문 서비스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국제적인 디자인 전략 컨설팅 회사인 프로그(Frog) 출신 디자인 연구가인 얀 칩체이스(Yan Chipchase)가 미국에서 다국적 디자이너 팀을 데리고 와서 과제를 진행했다. 시티뱅크의 펀딩을 받은 그의 과제는 회사 내 최정예 디자이너 팀과 함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진행되었기에, 부럽기도 한 마음에 그가 어떻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지 지켜보았다. 몇 달 후 비슷한 시기에 결과 발표회를 했다. 그의 결과와 비교해서 미얀마 현지인들로 구성된 우리 팀의 결과물이 어느 것 하나 뒤지지 않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팀원들과 함께 보람 있고 기분 좋은 뿌듯함과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그런데 몇 달 후 나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의 결과물이 책으로 출판되었다. 모든 프로젝트의 과정과 결과를 상세히 설명해 놓은 책이었다. 미얀마는 놀라울 정도로 축적된 지식이 없는 나라이기에, 책으로 남는 연구 결과는 그 사회에 훌륭한 지식으로 남을 수 있음을 알았기에 더욱 놀라웠고, 그들의 성과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의 결과물은 어느 곳이나 전달될 수 있는 지식으로 남아 있고, 나의 100장이 넘는 연구 결과물은 회사 내 자료로 남았다. 발표 자료는 있지만, 그 과제를 제대로 설명할 사람은 이제 그곳에 없다.

세상에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힘은 글쓰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글로 쓴 것, 기록한 것만이 남는다. 이제는 글을 쓸 때이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