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장 맘대로 '한 상의 매력'…대중화 길 걷는 ‘오마카세의 세계’
고급 일식집 이미지서 새 식문화로 발전
가격·종류 다양화로 일반인 선호도 증가
개인 취향 중시하는 젊은 층에서도 인기
이모카세·아재카세 등 파생어까지 등장
오마카세(おまかせ). 이젠 우리에게도 익숙한 일본말이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오마카세 식당’이 유행하면서 식문화 용어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오마카세는 ‘타인에게 맡김’이란 뜻으로, 정해진 메뉴 없이 그날 그날 음식을 주방장이 알아서 내놓는 방식이 특징이다.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인기가 거세다. 개개인의 취향이 확실한 요즘 젊은이들이 메뉴 선택권을 온전히 주방장에게 맡기다니. 왠지 어색한 만남 같다. 최근 일본 언론은 우리나라 오마카세 유행 이면에 ‘한국인의 허세’가 깔려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히 SNS에서 과시하기 위한 ‘사치성 소비’로 여기기엔 설명이 부족해 보인다.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식문화로 자리잡을 정도라면 분명 또 다른 매력이 있을 터. 그 끌림의 이유를 찾아 오마카세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 원조 일본엔 없는 ‘한국식 오마카세’
식문화로서 오마카세가 정확히 일본의 어느 지역에서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초밥집에서 유래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현재 일본의 고급 스시집에서 일반적인 방식인 오마카세 식당은 1980년대부터 생겨났다. 식당에서 책정한 가격 내에서, 혹은 손님이 예산을 미리 알려주면 주인이 계절에 맞는 재료로 스시를 만들어 내어 놓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어시장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장이 파하는 시각, 남은 생선들을 근처 식당에서 헐값에 가져다 요리로 만들어 팔았는데, 가격만 같을 뿐 생선 종류는 매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문화가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기를 거치면서 스시집을 중심으로 고급화됐다는 설명이다. 시작을 어디에 놓든, 오마카세의 탄생 배경엔 실용적인 이유가 있다. 남은 재료를 신선할 때 소비하기 위해, 또는 제철의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맛보기 위해 시작된 방식인 것이다. 참고로, 오마카세는 가이세키·갓포 등 메뉴가 일정한 코스요리와는 차이가 있다. 더 대중적인 이자카야는 밥집보다 술집에 가깝다.
일본식 정통 오마카세는 2000년대 서울지역 특급호텔 일식당을 통해 국내에 본격적으로 전파된다. 이후 이들 식당 출신 셰프들이 독립하면서 오마카세 문화가 퍼져나간다. 특히, 코로나19 기간 해외여행에 목말라하던 이들에게 대체재로 주목받으면서 오마카세 식당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다만 이들 식당은 스시뿐만 아니라 다양한 일식 메뉴를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 현지 정통 오마카세와는 차이가 있다. 지난해 <서일본신문사> 부산주재원으로 활동한 히라바루 나오코 기자는 “한국의 오마카세 문화는 폭넓은 일식 메뉴를 융합한 ‘퓨전 일식’에 가까운데, 사시미·타코야키·야키소바·당고 등 다양한 일식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반면 가격은 너무 비싸게 느껴졌다”며 “일본에서 넘어온 오마카세 식당이 한국에서 남녀 데이트 장소로 선호되는 점은 일본인의 눈으로 봐도 정말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 정통 스시 오마카세는 어떤 맛일까
그동안의 일본 문화가 부산을 통해 가장 먼저 국내로 유입된 반면, 정통 오마카세 식당은 서울지역에 주로 몰려 있다. 부산엔 해운대와 서면 등 일부 도심지를 중심으로 일반 메뉴와 오마카세를 병행하는 스시집이 있다.
지난봄 해운대구 엘시티몰에선 흔치 않은 현지식 정통 오마카세 식당이 문을 열었다. 가게 이름(‘허교수 스시 오마카세’)부터 눈길이 가는데, 알고 보니 허동한 오너셰프가 일본의 한 대학 교수 출신이다. 정년을 꽤 남겨 둔 2020년 요리사의 꿈을 좇아 상아탑을 떠났고, 스시의 세계로 입문했다고 한다.
일본 스시는 크게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식과 도쿄 중심의 에도마에식으로 구분되는데, 허교수 스시는 정통 에도마에 스시를 표방한다. 날마다 요리 품목이 조금씩 바뀌는데 스시에 앞서 스모노, 일본풍 비스크(식전스프), 차완무시(달걀찜), 야채 오란다니 등 일품 요리가 차례로 먼저 나온다.
이어 본격적으로 14가지 스시가 뒤따른다. 도미·참치·아카무츠(금태)·갑오징어·이쿠라(연어알)·히라메(숙성광어)·고등어·장어 등 제철 생선과 해산물 위주의 다채로운 구성이다.
평소 일식을 자주 접하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메뉴가 생소할 법하다. 입문자들을 위해 재료와 요리법을 간략히 적은 메뉴지가 이해를 돕는다. 여기에 허 셰프의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이니 일식에 대해 알아가는 맛도 있다.
허 셰프는 스시마다 3종류의 간장 중 어울리는 하나를 찍어 내놓는다. 눈 앞 도마 위에서 손질되는 식재료와 회칼의 움직임을 보는 것도 이채로운 경험이다. 허 셰프는 교수 시절 방학 때 슈퍼마켓 선어코너에서 알바를 하며 생선 자르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손맛에 담긴 수련의 시간을 생각하니 한 점 한 점 더 꼼꼼히 음미하게 된다.
우리나라 해산물과 오마카세의 만남은 어떨까. 경남 통영에 가면 남해의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오마카세 식당이 있다. 미륵산 자락 야솟골에 자리한 ‘야소주반’은 김은하 대표가 당일 새벽시장에서 식재료를 공수해 그날의 차림을 내어 놓는다. 음식에 곁들여, 건축가 출신 남편이 손수 빚은 전통주(건축가가 빚은 막걸리·약주)도 매력적인 조합이다.
■ 고급화 넘어 대중화…넓고 깊게 즐기다
오마카세는 스시에서 시작됐지만 일본만의 문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방장 특선’ 혹은 ‘맡김차림’이란 뜻풀이처럼, 우리나라도 일정 금액을 내면 주방에서 그날의 기본 안주를 차려주는 실비집·다찌집 같은 문화가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다.
부산에서는 중구·서구 원도심 일대와 부산진구 서면 등지에서 ‘실비집’ 혹은 ‘푸짐한집’이란 상호를 내건 식당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 서면 가야교회 인근 ‘부싯돌 푸짐한집’은 20년 가까이 한자리를 지켜 온 소위 ‘이모카세’ 식당이다. 기본 2만 5000원을 내면 이모의 손맛이 담긴 다양한 안주를 맛볼 수 있다. 먼저 땅콩·소라·번데기·김·마·꼬막무침 등 기본찬이 깔리고 뒤이어 메인 요리인 순두부찌개가 나온다. 닭모래집, 가자미구이, 명태전, 두부조림, 해물파전, 닭염통꼬치, 연근·고구마튀김까지. ‘다음은 어떤 안주일까’ 궁금해하며 하나씩 세어 보니, 30분 동안 14가지 음식이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2~3명이 먹기 적당한 양에 맥주3병(또는 소주 2병)이 포함된 가격이라 ‘저렴하고 부담 없는 집’이란 간판 문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단돈 2000원에 안주를 추가할 수 있고, 김치전골·어묵탕 등 취향에 따라 단품 메뉴를 주문해도 좋다. 가게 안 테이블은 단 5개. 자리가 적어 절로 오붓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초저녁엔 어르신들 위주였는데, 한 차례 테이블이 회전한 뒤엔 젊은이들도 꽤 눈에 띈다. 근래 SNS에 소개되면서 2030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래 초창기엔 오마카세 문화가 고급 일식당에 한정됐다면, 최근 들어 이모카세·할마카세·아재카세 같은 파생어가 나올 정도로 폭넓게 변모하는 양상이다. 메뉴도 한층 다양해졌다. 한우·스테이크 같은 한식·양식 오마카세는 물론, 와인 오마카세, 족발·치킨 오마카세, 커피·차 오마카세까지 등장했다. 일각에선 상업적인 마케팅 전략이란 비판도 나오지만, 맡김차림 문화의 대중화 흐름만큼은 선명히 읽힌다. 대동여주도 이지민 대표는 “전통주 분야에서도 오마카세 주점이 늘고 있고 양조장에서 전통주와 어울리는 차림상을 내놓기도 한다”며 “전문가가 메뉴를 엄선하고 맛과 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페어링을 추천하기 때문에, 특정 음식을 깊이 있게 맛볼 수 있는 매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오마카세 방식은 소량 다품종의 시대적 흐름과도 맞아떨어진다. 박정배 음식평론가는 “오마카세의 가장 큰 장점은 단품과 달리 조금씩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는 점”이라며 “밥과 술안주를 같이 먹는 복합적인 문화와도 어우러지면서 오마카세의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