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광풍 속 ‘좌익 색출’ 미명 아래 제주는 다시 피로 물들어[한국전쟁 정전 70년 한신협 공동기획]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 예비검속 제주 지역민 학살

한국전쟁 발발하자 방범 명목 구금
사상 의심만으로 재판 없이 총살
1950년 8월 검속 1120명 달해
제주공항 활주로 아래 시신 매장
유해 388구 중 신원 확인 90명 뿐
4·3 연루 대정 주민 등 무차별 연행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집단학살
6년 만에 시신 132구 수습·이장

2008년 제주공항에서 진행된 예비검속 학살자 유해 발굴 현장을 관계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제주일보 제공 2008년 제주공항에서 진행된 예비검속 학살자 유해 발굴 현장을 관계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제주일보 제공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도에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돼 학살당한 것이다.

당시 정부는 ‘좌익분자를 색출한다'는 미명 아래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또 전국 형무소에 수감된 4·3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됐다. 예비검속은 범죄 방지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에 구금하는 것으로 일제가 남긴 악습이었다.


■불어닥친 예비검속 광풍

경찰 문서에 따르면 1950년 8월 도내 4개 경찰서(제주·모슬포·성산포·서귀포)에서 예비검속된 도민은 1120명이었다.

경찰은 검속된 이들을 A·B·C·D 네 등급으로 분류했다. C·D등급은 예비검속자 등급별 조사 과정에서 군 송치 대상자로 분류돼 계엄군에 넘겨져 총살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적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들이고 학살한 것이다.

이 중 제주도 북부(제주읍·조천면·애월면) 예비검속자는 500여 명에 달했다.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생존자와 목격자는 “1950년 8월 19~20일 이틀간 제주국제공항(당시 정뜨르비행장)에 끌려간 예비검속자들이 집단 학살된 후 암매장됐다”고 증언했다.

4·3 당시 최대 학살터였던 제주공항 활주로 밑에는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4·3 영혼이 잠들어 있다. 그런 활주로에는 매일 많은 비행기가 쉼 없이 오르내린다.

당시 제주공항은 비어 있는 드넓은 공간이어서 외부의 눈에 띄지 않아 총살 집행에 최적의 장소였다는 증언이 있다.

제주4·3평화재단은 제주공항에서 2007~2009년 3년간 유해 발굴을 실시했다. 2018년에도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4·3 당시 암매장된 유해 388구를 발굴했고 유전자 감식으로 90구의 신원을 확인했다.

신원이 확인된 90명은 1949년 군사재판 사형수 47명, 서귀포 예비검속 13명, 모슬포 예비검속 7명, 일반인 23명이다.

서귀포 예비검속자들은 정방폭포 앞바다에 수장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제주공항에서 집단 학살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199명이 암매장된 제주도 북부 예비검속자 유골은 단 한 구도 나오지 않았다. 가장 많은 희생자가 기록된 지역이다.

1973년 길이 2000m, 너비 45m의 제주공항 남북활주로 개설 공사 당시 유골이 무더기로 나오자, 근로자는 물론 장비까지 모두 교체됐다. 일부 유골은 제주시 어승생 무연고 묘지에 안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도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많은 이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은 상황이다.


4·3 행방불명 희생자를 기리는 조형물과 유해가 한데 뒤엉켜 모두 한 자손이 됐다는 뜻을 가진 ‘백조일손지묘'. 제주일보 제공 4·3 행방불명 희생자를 기리는 조형물과 유해가 한데 뒤엉켜 모두 한 자손이 됐다는 뜻을 가진 ‘백조일손지묘'. 제주일보 제공

■132기 잠든 백조일손지묘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공동묘지 한편에는 한 울타리 안에 조그만 봉분 132기와 함께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고 적힌 묘비가 있다.

여기에 잠든 이들은 일제가 남긴 송악산 서쪽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집단 학살된 지역주민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학살이 있던 그해 8월 20일까지 4·3과 관련해 구속된 사람을 대상으로 벌어진 섯알오름학살사건은 이른바 예비검속을 명분으로 대정과 안덕, 한림 지역주민을 무차별 연행하면서 시작됐다.

연행된 사람은 형식적인 재판 절차 없이 대정읍의 고구마 창고에 유치된 뒤, 칠월칠석인 1950년 8월 20일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집단 학살됐다.

유족들은 현장을 찾아 유해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군경 당국의 출입 통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6년여가 지나서야 시체를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체가 썩고 유골이 뒤엉켜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유족은 유골 132구를 한곳에 이장하며 서로 다른 132명의 조상이 한날한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됐으니 이제 모두 한 자손이라는 뜻으로 묘지에 ‘백조일손지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어렵게 백조일손지지 묘비를 만들었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들어선 군사정권 때 묘비가 파괴되기도 했다.


학살이 자행된 서귀포시 대정읍 섯알오름의 탄약고 자리. 제주일보 제공 학살이 자행된 서귀포시 대정읍 섯알오름의 탄약고 자리. 제주일보 제공

■유가족이 몰래 수습…만벵디 묘역

만벵디(듸) 묘역에 묻힌 이들은 한국전쟁 직후 한림지서 관할 한림항 어업조합 창고, 무릉지서 창고에 갇혔다가 1950년 8월 20일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사상이 의심스럽다’, ‘4·3 당시 가족 중 누군가 희생됐다’, ‘군경관에 비협조적이다’ 등의 이유로 재판 절차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 우익인사, 농민, 여성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희생됐다.

이 사건의 희생자는 62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만벵디 묘역에는 현재 46위가 안장돼 있다. 시신 수습은 1956년 3월 30일에야 이뤄졌다.

경찰과 군인 몰래 일부 유족이 모여 칠성판, 광목, 가마니를 준비하고 새벽 2~3시께 섯알오름으로 트럭을 몰고 가 희생자 시신을 수습했다. 만벵디 묘역의 터는 유족 중 한 명이 무상으로 내놓았다.

당시 유족은 머리 모양이나 치아, 썩지 않고 남은 옷, 소지품 등으로 시신 일부를 구별했다.

한편 제주4·3은 1948년 4월 3일~1954년 9월 전개됐다. 섬 곳곳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제주도 전체 인구 30여만 명 중 10%인 3만여 명이 목숨을 잃거나 행방불명됐다. 또 중산간 마을 95%가 소실됐다.

이후 제주도민은 국가보안법의 연좌제, 고문 피해, 레드 콤플렉스 등에 시달려야 했다. 또 빨갱이, 폭도의 가족이라는 낙인과 당국의 감시가 두려워 억울하게 희생당한 부모형제의 제사도 조용히 지내야 했다.

홍의석 제주일보 기자 honges@jejunews.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