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서 만든 ‘파도’,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 ‘로카르노 영화제’ 진출
부산 출신 정유미 감독 신작
단편 경쟁 부문 진출 쾌거
다음 달 4일 세계 최초 공개
심사 결과 따라 수상 결정
해운대서 영감 ‘다양한 삶’ 표현
제작사 매치컷도 부산에 둥지
부산 감독과 제작사가 만든 애니메이션 ‘파도’가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 진출했다. 예술영화를 선호하는 세계적인 영화제에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초청되는 쾌거를 이뤘다. 정유미 감독이 해운대 바다에서 영감을 떠올린 이 작품은 파도를 통해 다양한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부산 제작사 매치컷은 정유미 감독 신작 ‘파도(The Waves)’가 제76회 로카르노 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인 ‘미래의 표범(Pardi di domani)’ 섹션에 초청됐다고 6일 밝혔다. 작품은 다음 달 4일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세계 최초로 상영하고, 심사 결과에 따라 수상도 가능하다.
로카르노 영화제는 1946년부터 매년 8월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열리는 세계 6대 국제영화제다. 봉준호, 홍상수 등 국내 유명 감독들이 주목받은 계기가 된 영화제로 예술영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올해는 다음 달 2일부터 12일까지 열린다.
애니메이션 영화 ‘파도’는 인간의 삶을 8분 남짓으로 표현했다. 파도가 밀려왔다 나가는 해변에 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은 저마다의 행동을 반복한다. 아이는 공놀이에 집중하고, 한 여자는 수영복만 입고 바다로 향한다. 정장을 입은 남자는 모래성을 쌓는다. 그러다 강한 파도가 모래성뿐 아니라 공과 옷가지를 휩쓸어 간다. 인생의 여러 모습을 담은 작품은 연필 드로잉 기법을 사용했고,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현대미술관 지원으로 제작됐다.
정유미 감독은 “작업실에서 해운대 바다가 한 뼘 정도 보이는데 다양한 사람이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흥미로웠다”며 “밀려갔다 돌아오고 늘 반복되는 파도라는 소재로 이야기할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모래성을 파도가 휩쓰는 장면 등은 언제나 끝은 있다는 걸 표현하려 했다”며 “허무주의처럼 느껴지지만 조금 더 넓게 보면 집착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지는 길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나이가 지긋한 여성은 새와 고양이 그리고 사람을 배에 태워 보내더니 마지막에는 자신도 그 배에 올라타기도 한다. 주변 사람과 동물을 떠나보낸 사람이 죽음을 맞아 다른 세계로 떠나는 과정을 그렇게 표현했다. 해변에서 무기력하게 자고 있던 여성이 파도에 휩쓸려 고군분투하는 소녀를 구하기도 한다.
영화 ‘파도’를 만든 정 감독과 제작사인 매치컷 김기현 PD는 2016년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온 부부다. 2006년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울에서 꾸준히 작업을 함께하다 해운대에 작업실을 차리고 작품을 만들고 있다. 정 감독은 “개인 작업이 많은 데다 회의는 화상으로 대체하니 부산에 있어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김 PD는 “서울은 작업 공간을 구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고 작업에도 집중하기가 어려운 환경이었다”며 “언젠가 돌아가고 싶었던 부산에 왔는데 후반 작업이나 스태프 구하기가 어려운 점 정도만 아쉬울 뿐 작업 환경은 괜찮다”고 밝혔다.
정 감독은 그동안 칸영화제와 베를린국제영화제 등 세계 주요 영화제에 작품을 선보였다.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공식 회원이기도 하다. 봉준호, 박찬욱, 이창동 감독부터 최근에 가입한 박해일 배우까지 한국에서는 50여 명이 회원인 것으로 파악된다.
2009년 단편 ‘먼지아이(Dust Kid)’가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칸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받았다. 이 작품은 2014년 그래픽 노블로 출간되면서 한국 그림작가 최초로 볼로냐 라가치 대상(뉴 호라이즌 부문)을 받기도 했다. 2010년 단편 ‘수학시험(Math Test)’은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베를린국제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정 감독은 ‘연애놀이(Love Game)’로 자그레브 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대상인 그랑프리를 받기도 했다.
부산에 자리 잡은 제작사 매치컷은 정 감독 작품들뿐만 아니라 여러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영화 ‘파도를 걷는 소년’은 201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부문 배우상 등을 받았다.
영화 ‘킬러스웰:아워 스페이스’도 같은 해 제작했다. 서핑 장면 등이 나오는 이 작품은 부산에서 모든 장면을 촬영했다. 영화에는 드라마 ‘파친코’에서 선자 역을 맡은 김민하 배우가 출연했다.
올해 3월 개봉한 ‘여섯 개의 밤’도 부산에서 모든 촬영을 진행했다. 이 작품은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 시네마 부문에 초청됐다.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