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다음은 누구인가

최세헌 기자 corni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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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헌 사회부장

5개월 앞둔 수능 출제방향 변화
고속도로 대형 국책사업 백지화
대통령·장관 말에 쉽게 바뀌는 정책
노조·사교육업계를 카르텔로 규정
더 심한 부패 걷어내는 게 선행돼야

일명 ‘김건희 고속도로’ 논란이 뜨겁다.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을 둘러싸고 김건희 여사 일가 땅과 가깝게 고속도로 노선 변경을 추진한 게 아니냐는 특혜 의혹을 민주당이 제기했다. 그러자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민주당이 정치 공세를 벌인다며 별안간 고속도로 건설 계획 백지화를 선언했다. 인근 주민들의 반발은 거세고, 특혜 의혹은 여당과 야당의 설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야당이 문제 제기를 했지만, 국민이 의혹을 가지고 특혜와 관련한 합리적 의심이 드는 상황이라면 변경 이유에 대해 정부는 당당하게 설명하면 된다. 그 의무를 무시하고 일방적인 백지화로 덮으려는 것은 의혹만 더 키울 뿐이다. 여러 논란은 차치하고 주민들이 15년간 요구한, 1조 8000억 원 규모의 국책사업을 장관의 말 한 마디로 엎을 수 있다는 것은 이 정권이 내세우는 법과 원칙에 어긋날 뿐더러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항)’ 배제가 결정된 올해 수능 논란도 윤석열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서 비롯됐다. “비문학 문항 등 공교육 교과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부분의 문제를 수능에서 다루면 안 된다”고 언급하면서 학생들은 물론 교육계가 혼란에 빠졌다.

굳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자면, 수능의 변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사교육비 경감 문제를 구조적인 문제로까지 확대하는 논의의 장을 펼쳤다는 점은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수능을 150여일 앞두고 출제 방향을 직접 지시하고, 바꾸는 것은 전례가 없다. ‘공정 수능’을 위해선 예측 가능성이 중요한데, 갑작스러운 변화는 오히려 사교육을 부채질한다. 특히 킬러 문항은 어차피 최상위권 학생들 ‘그들만의 리그’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킬러 문항을 맞추기 위해 사교육을 받는 게 아니다. 킬러 문항만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교육당국이 내세운 사교육비 경감 대책으로는 맞지도 않을 뿐더러 대통령의 말을 급하게 띄우기 위한 졸속 대책에 불과하다.

그쯤에서 그쳤으면 그나마 좋았다. 나아가 사교육 업계를 ‘이권 카르텔’로 규정했다. 연봉 100억 원을 버는 ‘일타강사’를 이 모든 문제의 원흉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했다. 이에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은 “킬러 문항을 만든 건 교육당국이고, 사교육은 대응했을 뿐이다. 일타강사는 많은 학생을 가르쳐서 수입이 많은 것이다. 손흥민이 공을 너무 잘 차니깐 고액 연봉을 받는 것과 같다”고 일갈했다. 이후 대형 학원에 대한 세무조사가 시작됐고 유착에 대한 경찰수사도 들어갔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는 무겁고도 무섭다. 지금은 이권 카르텔로 통칭되고 있는데, 노동조합, 시민단체, 사교육계 등 대통령이 언급하는 집단들은 부도덕하고 이권을 챙기는 집단으로 낙인 찍혔다. ‘공정과 법치’라는 이름 하에 비리 집단으로 낙인 찍히면 검찰, 국정원, 국세청, 감사원 등 사정기관들이 총동원돼 왔다. 일사불란하다. 이 같은 패턴은 고착화돼 ‘다음은 누가 낙인 찍힐까’라는 공포심마저 든다.

비리를 저지르면 누구나 벌을 받아야 하고, 카르텔이나 폐단이 있으면 시스템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건 비단 공정과 법치를 내세우는 이 정권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정권에서도 유효하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와 윤석열 정부의 이권 카르텔은 그런 의미에서 같다. 집권 초기 적폐 청산을 내세운 문재인 정부의 개혁성이 적폐 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상당 부분 후퇴됐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래도 최소한 ‘강한 기득권’이라는 적폐의 기준은 있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현재 이권 카르텔 규정에 대한 기준은 잘 모르겠다.

비리를 저지르는 노조는 분명 비판받아야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한 기득권을 가지는 원청업체의 갑질이나 재벌의 독과점·정경 유착 등이 상대적으로 더 큰 문제다. 시민단체의 보조금 횡령도 문제지만, 대학교수의 연구비 횡령과 지자체·대학 등의 보조금 비리 규모가 더 광범위하다. 사교육계를 바로 잡기에 앞서 공교육 정상화에 대한 질책이 먼저 돼야 한다. 이젠 너무 식상하지만 ‘전관 예우’로 대표되는 ‘법조 카르텔’도 여전하고, 18년째 의대 정원 동결을 주장해온 ‘의료 카르텔’도 대통령이 말하는 낱낱이 걷어내야 하는 ‘킬러 규제’다.

현 정권이 주장하는 이권 카르텔 타파가 국민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지지를 얻으려면, 마음 내키는 대로 혹은 고정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특정 대상을 악마화할 게 아니라 더 많은 기득권을 가진 집단, 더 부패한 집단을 먼저 찾아내 바로잡아야 한다. 너무나도 뻔한 카르텔들이 존재하는데도, 곁가지만 붙잡고 있으면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음은 누구인가.


최세헌 기자 corni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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