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두구동에 피는 문화의 꽃
골목골목 보석 같은 공방, 다시 쓰는 부산 문화지도
“요즘 두구동, 가 보셨나요?”
부산 금정구 두구동 공덕초등학교 일대. 전형적인 농촌 마을에, 1~2층짜리 낮은 물류 창고가 가득한 이곳은 요즘 트렌드에 관심이 많은 힙스터들이 대거 몰리는 핫 플레이스로 변신 중이다. 2010년부터 예술가들의 보석 같은 공방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으면서 도시 외곽 농촌인 두구동 마을의 색깔까지 바꾸고 있다. 대학 교수, 건축사, 패션 디자이너, 미학 연구자 등 다양한 경력의 전문 아티스트가 자기 이름을 걸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서로의 예술적 성장을 돕고 있다.
■보석 같은 아티스트들 속속 집결
2019년 4월 ‘열린 작업실’로 개관한 붐빌(BOOMVILL) 스튜디오. 부산 유일의 유리 블로잉 공방인 이곳에서 유리 아티스트 이재경 작가와 이정윤 작가가 1200도 가마의 후끈한 열기와 함께 유리를 녹이고 덧대고 불고, 구부리면서 유리 작품을 만들고 있다. 일본 타마미술대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도 남이섬 문화원장, 한국도자재단 유리예술감독, 경희대 교수를 거친 이재경 작가는 유리공방 설비를 서울에서 통째로 부산으로 옮겼다. 코끼리 설치 미술가로 유명한 이정윤 아티스트는 이곳에서 미술사 교육과 함께 설치 작품도 직접 만든다. 금속작가 김재훈과 주얼리 디자이너 공행재 부부가 운영하는 보석공방 ‘주얼리갤러리공’. 금속이라는 소재를 통해 매력적인 금속과 주얼리 작품을 제작하고, 교육하는 공간이다. 예쁜 정원을 갖추고 있는 주얼리갤러리공에는 금속 및 주얼리, 오브제 작품을 판매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예술대학원을 졸업한 홍찬일 작가의 금속공예공방에서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금속공예·주얼리·금속 조각을 테마로 작품을 제작한다.
건축 전공으로 3년 전 두구동에 정착한 김병석 작가는 목공방 ‘BSK woodworks’에서 원목 가구 및 원목 소품을 주문 제작한다. 김병석 작가는 “도심의 번잡함이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작가들이 조용히 작업하기 좋은 두구동을 선호하는 듯하다”면서 “공방 작가분들은 여기 아예 뿌리 내릴 생각으로 온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소개했다. 패션을 전공한 박지혜 작가는 헤이그린 원예공방에서 식물 공간 조경과 조경 수업을 한다. 최근에는 창고의 거친 느낌을 살리고 원예로 포인트를 준 촬영 스튜디오까지 차렸다. 미학을 전공한 김창훈 작가의 두구두구커피공방은 작업공간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커피와 예술의 접목을 시도한다.
부산대 미대를 졸업한 한국화 작가 조재임은 붓으로 그리는 전통적인 방식을 쓰지 않고 한지나 생견에 물감을 흩뿌려 채색한 뒤 잎과 가지의 형태를 하나하나 오려 내 반복적으로 붙이는 작업을 한다. 중국 항저우에서 화조화와 인물화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정상지 작가는 한국화공방 이목유지(耳目有知)에서 번지지 않게 특수처리된 화선지에 세필로 먹선을 긋고, 정교하게 채색하는 공필화 작업을 한다. 최근에는 아이를 키우는 일상에서 겪는 에피소드를 따뜻한 색감과 귀여운 이미지로 그려 내고 있다. 이들 10개의 공방은 유치원생부터 초중고생, 미술 전공자와 작가, 동네 주민들이 삼삼오오 커피를 마시거나, 교육받고, 실습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한다.
미국 뉴욕 프랫대학원을 졸업한 이정윤 작가는 “이렇게 아이덴티티가 뚜렷한 공방들이 한곳에 모이기가 엄청나게 어렵다”면서 “부산 두구동에서 만난 다양한 예술가들이 서로 경험하지 못했던 영감을 주고받아 증폭시키고, 또 다른 흐름을 만드는 아티스트들의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예술가들의 플랫폼으로 승화
2022년 두구동에 공방을 둔 작가 10명이 비영리법인 ‘하이 두구(Hi Dugu)’란 이름으로 한데 뭉쳤다. 협업과 공유를 매개로 예술가 커뮤니티를 형성한 것이다. 개별 공방 차원의 행사는 물론이고, 아트페어와 전시회, 작가와의 교류, 재즈 페스티벌, 미술 교육 등 다양한 행사도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그 결실이 지난해 12월 사흘 동안 ‘하이 두구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이어졌다. ‘북극곰 달 무드 등’(박지혜) ‘나만의 커피 블렌딩’(김창훈) ‘바람풍경 만들기’(조재임) ‘오색빛 칠보공예’(홍찬일) ‘비단 채색화’(정상지) ‘나만의 유리컵&블로잉 체험’(이재경) 등 교육 프로그램과 소품 위주의 아트 페어도 열렸다. 지난 6월에는 금정문화회관에서 하이 두구 회원 작가들의 합동 전시회도 개최했다.
장르가 다양한 작가들의 공방이 입소문 나면서, 유치원생, 초중고생은 물론이고, 미술 전공 학생과 전문 작가, 일반인 등의 방문이 줄을 잇고 있다. 방문객들은 공방 몇 군데를 방문한 뒤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즐기고, 금정체육공원 일대를 산책하면서 한나절을 보내는 등 자연스레 하이 두구 예술인촌 탐방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정도다.
붐빌 스튜디오 이재경 작가는 “예술인들이 콜라보를 이루면서 서로의 작업에 지지가 되는 등 이점도 많다”면서 “설치작가와 유리, 금속, 목공 등 장르가 다른 작가들이 밀집하면서, 상상으로 그칠 수 있는 구상과 이미지를 기술적 협력을 통해 작품으로 수월하게 만들어 낸다”고 소개한다.
주민들의 문화 향유 기회도 증가하고 있다. 붐빌 스튜디오의 붐빌 키즈는 물론이고, 홍찬일 금속공방, 헤이그린, 이목유지 등 각각의 공방에서 원데이 레슨과 방학에는 주변 어린이를 위해 전문 작가들이 교육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운영한다.
붐빌 스튜디오 이정윤 작가는 “두구동 엄마들이 인스타그램 등을 보고 아이를 데리고 오거나, 학생들이 지나가다가 공방에 불쑥 들어와서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 경우도 많다”면서 “아이들이 공방에서 직접 유리를 녹여 자신만의 목걸이나 컵, 보석 팔찌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예술과 친숙할 기회를 갖게 된다”고 밝혔다.
■브루클린 덤보와 같은 예술인촌으로
두구동은 5년, 10년 뒤에는 어떻게 될까. 작가들은 현재도 많은 예술가가 두구동으로 오고 싶어 하고, 공방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있다면서 예술인 숫자가 훨씬 많아질 거라고 기대한다. 차츰 전문적인 아티스트들이 모이면 뉴욕 맨해튼 브루클린의 덤보(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나 일본 가나자와 예술인촌처럼 지도에 스탬프를 찍으면서 예술인촌 공방을 견학하는 그런 문화 단지로 성장하려는 바람도 갖고 있다.
실제로 브루클린 덤보는 뉴욕 맨해튼교와 브루클린교 사이에 있는 버려진 공장 지역이었지만, 비싼 집값을 이기지 못한 맨해튼 예술가들이 대거 이동하면서 예술가 집적 지역으로 변모했다. 뉴욕시는 예술가들이 이곳을 가구와 액세서리, 조명을 만드는 공방으로 활용하도록 청년 예술가 레지던시 프로그램, 공공 갤러리 제공 등을 통해 적극 장려했다. 덤보와 가나자와, 두구동의 공통점으로 △도심과의 접근성 △싼 임대료 △편의성 △멋진 자연 경관 △장르를 불문한 다양성 △민간 예술인 주도 등을 꼽을 수 있다.
일본 유학 후 두구동에 정착한 공행재 작가는 “한국도 일본의 마츠리 등 마을 단위의 문화예술 활동을 접목할 필요가 있다”면서 “일본 가나자와, 미국 브루클린의 덤보나 소호, 서울의 성수동처럼 두구동이 누구나 걷고 보고 경험하고 싶은, 예쁜 예술인 마을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