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디폴트옵션 의무화 '300조 시장' 본격 경쟁
사전지정운용제도 12일 시행
고객 투자성향 따라 상품 선택
위험도 따라 수익률도 제각각
증권사 '충성 고객' 유치 전쟁
근로자가 운용 책임을 지는 퇴직연금 확정기여(DC)형에 가입한 직장인 김 모 씨는 지난해 금리가 높을 때 적립한 돈을 정기예금에 넣어놨다. 그런데 이달 초 가입한 금융사로부터 알림을 하나 받고 고민이 생겼다. 이번 달부터 퇴직연금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가 의무화되면서 예금이 만기되면 돈을 어떻게 굴릴지 미리 정해놔야 한다는 소식이었다.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이 12일부터 본격 시행됐다. 디폴트옵션은 퇴직연금 DC형 또는 개인형 퇴직연금(IRP) 가입자를 대상으로 하며 별도의 운용 지시가 없을 때 미리 선택한 상품에 적립금이 자동 투자되도록 한 제도다. 한 번만 지정하고 나면 이후에 지시가 없어도 일정 기간(6주)이 지나면 자동 투자되는 구조다. 디폴트옵션이 맘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상품으로 갈아탈 수 있다. 단 사업주가 운용하는 확정급여형(DB)은 해당되지 않는다.
디폴트옵션은 김 씨처럼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가입한 뒤에 방치된 퇴직연금 계좌가 많아 물가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마련됐다. 실제 현재 DC형 가입자의 90%는 별도 운영지시를 하지 않아 기회손실을 입고 있다. 대기성 자금은 통상 1~2%대인 원리금 보장 상품보다 이자가 낮다. 2017~21년 퇴직연금 적립금 평균 수익율은 1.96%에 불과했다. 은행권에서 취급 중인 디폴트옵션 상품 49개의 올 1분기 평균 수익률이 2.9%에 불과한 점을 고려하면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디폴트옵션을 지정할 때 가입자는 자신의 투자 성향에 따라 초저위험, 저위험, 중위험, 고위험 중에서 선택하면 된다. 저위험 디폴트옵션의 경우 원리금보장 상품인 예금의 비율이 50~70%라면, 중위험 디폴트옵션은 예금이 20~40%로 적게 구성되고 실적 배당형 상품인 TDF나 자산배분펀드(BF) 등의 비율이 60~80%로 많아지는 식이다. 고위험 디폴트옵션은 대부분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구성된다.
투자 성향에 따라 수익률도 달라진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디폴트옵션 상품의 평균 수익률은 3.06%다. 고위험이 4.81%로 가장 높았다. 이어 중위험(3.22%), 저위험(2.33%), 초저위험(1.11%) 순이었다.
디폴트옵션이 본격 시행됨에 따라 ‘300조 원’ 규모의 퇴직연금 시장을 둘러싼 금융투자업계 내 경쟁도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이날 자본총계 기준 상위 6대 대형 증권사(미래에셋·한국투자·NH투자·삼성·하나·KB증권)에 따르면 2분기 각 사의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유입된 퇴직연금 금액은 약 922억 5000만 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 1분기(501억 5000만 원) 대비 약 84% 증가한 수준이다.
현재 대형사들은 각종 예·적금 및 펀드 상품을 다양하게 조합해 만든 포트폴리오 개념의 디폴트옵션 상품을 각 사별로 7∼10개씩 판매하고 있다. 다만 아직은 예·적금 위주의 초저위험 상품군에 유입된 자금이 상당 부분일 것으로 추정된다.
증권가에서 투자자 유치에 열을 올리는 건 퇴직연금의 특성상 장기 투자 성향의 충성 고객을 한 번 확보해 놓으면 향후라도 다른 투자 상품을 판매할 기회가 생기고 자사 투자 플랫폼을 활용할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NH투자증권 김진웅 100세시대연구소장은 “코로나19 사태를 지나며 직접 투자를 경험한 사람들이 늘었다”며 “그런 경험이 쌓여 퇴직연금 자금에 대해서도 수익률이 높은 상품에 투자하려는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한편 대형 증권사들은 디폴트옵션 상품 고객들을 대상으로 일찌감치 각종 상품 증정 이벤트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고객 유치에 발 벗고 나섰다.
김진호 기자 rplk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