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환자가 도망가도록 병원 뒷문 열어준 ‘바보 의사’ 장기려 [부산피디아 ep.8 장기려]
한국전쟁 때 평양서 부산 피란
천막병원 진료하며 남몰래 선행
고신대병원 전신 복음병원 설립
의료보험 효시 청십자병원 운영
‘바보 의사’. 어쩌면 가장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이다. 모순마저 느껴지는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성산 장기려 박사다. 장기려는 한국 외과학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명성 높은 의사였다. 수십 년간 의사이자 교수로 일했고 심지어 직접 세운 병원도 여럿이다. 하지만 평생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며 그 자신은 죽는 날까지 집 한 채 없는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가 ‘바보 의사’라고 불리는 까닭이다.
부산지역 대학병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장기려는 현재 고신대병원의 전신인 부산복음병원의 설립자였으며 부산대병원 2대 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국민건강보험이 도입되기 전, 국내 최초로 민간 의료보험조합을 세우고 성공시켜 오늘날 건강보험제도의 기틀을 닦았다. 죽는 날까지 병원 옥탑방에서 지내며 환자를 돌보면서도 ‘나는 아직 가진 게 너무 많다’고 말한 바보 의사 장기려의 삶을 톺아봤다.
■공학자 대신 의사의 길로
장기려는 1911년 8월 14일 평안북도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세운 의성초등학교를 거쳐, 1928년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처음에 장기려는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공학자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나빠지자 수업료가 비교적 저렴한 경성의학전문학교(오늘날 서울대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1932년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한 장기려는 전공을 외과로 정하고 대학 부속병원에 남아 백인제 교수의 조수로 들어간다. 백인제 교수는 훗날 인제대 백병원을 설립한 인물이다. 장기려는 1940년 일본 나고야 대학에서 충수염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삼십이립’이라는 생각에 경성의전을 떠나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과장으로 간다.
이어 장기려는 1945년 평양도립병원 원장, 1947년 김일성대 의과대학 외과과장을 역임한다. 평양에서는 이미 그의 명성이 자자해 ‘장기려가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집도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장기려가 회고록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김일성이 맹장 수술을 위해 장기려를 먼저 찾은 건 맞지만 실제 수술은 소련 군의관이 집도했다.
■차남과 피란길에 오르다
1950년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한다. 국군은 장기려가 있던 평양을 1950년 10월 19일 점령했다. 장기려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군의관들은 그를 찾아 같이 일을 해달라고 졸랐다. 장기려는 국군 부상자를 치료하고 유엔 민간병원에 파견을 가기도 했다.
하지만 중공군이 남하하며 12월 3일 국군은 평양에서 급히 후퇴한다. 이때 장기려는 차남 장가용과 단둘만 국군 수송 버스를 타고 급히 피란을 떠난다. 장기려는 이때 부모님과 다른 가족을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을 평생 후회했다.
장기려 박사의 손주이자 차남 장가용의 아들인 인제대 서울백병원 장여구 교수는 “할아버지는 ‘중공군이 오면 젊은 사람은 다 죽인다’ ‘국군을 많이 치료했으니 피란을 가는 게 좋겠다’는 주변 말을 듣고 잠시 피란을 갔다 돌아오기로 하셨다”면서 “차남인 제 아버지는 할아버지 가방을 들어드리려 따라갔다가 통금 시간이 다 되면서 얼떨결에 함께 내려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천막 치고 피란민 돌봐
1950년 12월 18일 부산에 도착한 장기려는 제3육군병원에서 일하다 1951년 6월 20일 영도에 있는 교회 창고를 빌려 ‘복음병원’을 세운다. 이 복음병원이 바로 오늘날 고신대병원이다. 병원이라고 해도 빈 땅에 천막 3개를 친 것에 불과했다. 이곳에서 장기려는 유엔에서 원조 받은 약을 가지고 피란민을 돌봤다. ‘치료비를 받지 않는다’는 소식에 많게는 하루 200여 명의 환자가 몰렸다.
찾는 환자는 날이 갈수록 늘었지만 약은 충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많은 동료 의사의 무료 봉사와 시민들의 도움 덕에 점차 복음병원은 제대로 된 의료기관의 모습을 갖춰나간다. 장기려는 1976년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 봉직했다.
그에게 도움 받은 환자들의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한 환자가 치료 받고도 돈이 없어 눈치를 보자 장기려는 밤에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주며 “빨리 집에 돌아가서 푹 쉬고, 돈이 없어도 괜찮으니 며칠 뒤 꼭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또 영양실조에 걸린 환자가 ‘돈이 없어 먹을 걸 구할 수가 없다’고 토로하자 처방전에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내어주시오’라고 몰래 쓰기도 했다.
장여구 교수는 “할아버지가 명동성당 앞을 지날 때 한 걸인이 ‘돈을 달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통째로 준 적이 있다고 한다. 걸인이 은행에 가서 수표를 바꾸려고 하니 은행원이 ‘이건 틀림없이 훔친 것이다’라고 하자 뒤늦게 할아버지가 ‘내가 준게 맞다’고 한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이어 장 교수는 “여러 일화를 보면 할아버지는 정말 세상 물정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환자만 생각한 ‘바보 의사’였다”고 덧붙였다.
■국내 최초 의료보험을 만들다
장기려는 1968년 동료 의사들과 함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한다. 의료보험 제도 도입은커녕 보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때였다. 하지만 장기려는 ‘누구나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당시 담뱃값 100원에도 못 미치는 월 60원의 보험료만 받고 민영 의료보험을 운영한다.
장여구 교수는 “처음에는 사람들이 의료보험 제도 자체를 잘 모르니까 ‘장기려가 쩨쩨한 돈으로 사기를 친다’ ‘오래 못 갈 것이다’라는 말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혜택을 받는 영세민이 늘어나면서 규모 또한 꾸준히 커지게 됐다”고 전했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성공은 영세민에게 의료 혜택을 주는 걸 넘어서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조합에 대한 필요성을 널리 퍼뜨렸다. 의료보험연합회가 1997년 발간한 ‘의료보험의 발자취’에 따르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1968년 이후 시작된 임의가입 의료보험조합 중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이자, 1977년 의무 의료보험조합이 등장하기 전 공백기를 메웠다’고 극찬한다.
■뛰어난 의사, 청빈한 삶
장기려는 1943년 국내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나는 데 성공했고, 1959년에는 간암 환자의 간 대량 절제술에 성공했다. 국내 외과학, 그중에서도 간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독보적이다. 부산지역 여러 병원에도 그의 손길이 닿아있다. 고신대병원의 전신인 부산복음병원의 설립자이자 초대 원장인 동시에 1958년부터 2년 간 부산대병원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부산복음병원을 퇴직할 때쯤인 1975년에는 청십자병원을 설립해 원장직을 맡았다.
장기려는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9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1995년 인도주의 실천 의사상 등 무수히 많은 상을 받았다. 하지만 부유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집 한 채 소유하지 않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늦은 나이에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20여 평에 불과한 고신대병원 옥탑방에서 지내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의술을 펼쳤다. 그런데도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장기려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에 향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평생에 걸쳐 봉사와 나눔을 실천한 성산 장기려 박사. 국내 외과학을 개척한 의료인이자 국민건강보험의 기틀을 닦은 의료행정가였지만 오늘날 그를 되새김해야 할 이유는 따로 있다. 장여구 교수는 “할아버지 개인이 위인으로 남기보다는 그 정신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을 더 배려하는 ‘장기려 정신’이 널리 퍼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