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 살인’ 정유정, 반성문 제출하고도 판사가 읽을지 의심했다
페이지마다 판사 읽을지 의심하는 문구 적어
재판부 “꼼꼼하게 읽어보니 하고픈 말 써내라”
혐의엔 “약간 다른 부분 있지만 전체적으로 인정”
과외 중개 앱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또래의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정유정(23)이 재판부에 반성문을 제출하면서도, 판사가 반성문을 실제로 읽어볼지 의심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산지법 형사6부(부장판사 김태업)는 14일 오전 살인, 사체손괴, 사체유기 등 혐의로 기소된 정유정에 대한 공판준비기일을 열었다.
이날 법정에 모습을 드러낸 정유정은 단발머리에 안경과 마스크를 쓴 채 의연한 표정으로 입장했다. 공판 절차가 시작되자 정유정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재판에 임했다.
정유정 변호인은 “검찰 공소사실에 대해 세부적으로 약간 다른 부분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잘못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재판부가 정유정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자 정유정은 “네”하고 짧게 답했다. 하고 싶은 말이 없냐는 물음에도 “네”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지난 10일 반성문을 제출했는데, 반성문 각 페이지마다 판사가 이 반성문을 과연 읽어볼지 의심을 하며 썼다”며 “재판부는 피고인의 반성문을 구체적으로 다 읽어보기 때문에 어떤 형태든 써내고 싶은 말이 있으면 써서 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 측에서는 정유정이 어떻게 자라와 어떤 학창시절을 보냈는지 사건 전에는 어떤 심경이었는지, 살해 범행을 벌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등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며 “다음 공판준비기일까지 이러한 부분들을 잘 정리해서 제출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다음 달 21일 한 차례 더 공판준비기일을 연 뒤 본격적인 공판절차에 돌입할 계획이다.
정유정은 지난 5월 26일 오후 5시 50분 부산 금정구에 거주하는 피해자(26) 집에서 흉기로 피해자를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혐의를 받는다. 정유정은 피해자의 시신을 훼손한 뒤 시신 일부를 여행용 가방에 담아 경남 양산 낙동강변 인근에 유기했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정유정은 범행 당일 피해자를 마주한 자리에서 자신의 나이를 털어놓은 뒤 불우한 처지를 이야기하다가 “자살하고 싶은데 혼자 죽기는 너무 억울해 같이 죽을 사람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에 놀란 피해자가 도망가려 하자 “장난이에요”라고 하며 피해자를 방심하게 한 뒤 흉기를 마구 휘둘렀다.
정유정은 피해자를 110차례 넘게 찔렀다. 게다가 피해자 신원 확인을 위한 지문 감식을 피하기 위해 신체 곳곳을 훼손했다. 정유정은 피해자가 실종된 것처럼 꾸미려고 평소 자신이 산책하던 낙동강변에 시신을 유기했다.
범행 직전에는 아버지와 2시간 정도 통화하면서 살인을 예고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정유정은 2022년부터 ‘가족에게 복수하는 방법’ ‘사람 조지는 법’ ‘존속 살인’ ‘살인 방법’ 등을 검색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정유정은 어린 시절부터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던 것으로 보인다. 한 살 때 엄마가 곁을 떠났고, 여섯살 때는 아버지에게도 버림받아 조부의 손에서 컸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와 함께 살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보살핌을 못 받다가 아버지의 재혼으로 크게 상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정유정이 가족들과 잦은 불화를 겪으면서 대학에 진학해 독립하기를 희망했으나, 대학 진학과 공무원 시험에도 실패하는 등 어려운 경제환경과 생활환경에 대한 강한 불만이 원망과 분노로 변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러한 원망과 분노는 올해 5월 20일 할아버지와 집 청소 문제로 말다툼하다가 살인으로 해소하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정유정은 피해자를 물색하기 위해 무려 54명의 과외강사에게 접촉했고, ‘안 죽이면 분이 안 풀린다’ 등 살인을 암시하는 메모를 적기도 했다.
안준영 기자 jyou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