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여운형 장례식 만장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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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9일은 몽양 여운형이 서거한 날이다. 몽양은 “혁명가는 침상에서 돌아가는 법이 없다. 나도 서울 한복판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실제로 1947년 7월 19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괴한이 쏜 총에 목숨을 잃었다. 그가 서거한 자리에 있는 표석에는 ‘민족반역자의 사주를 받은 괴한의 흉탄’이라는 문구가 있다. 민족반역자로 추정되는 배후가 있다는 건데, 숱한 의혹에도 어찌 된 셈인지 사건은 평양 출신 미성년자의 단독 범행으로 종결됐다. 그런데 몽양 암살 시도는 그전에도 무려 10여 차례나 있었다. 참으로 집요하게도 몽양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개인 그것도 미성년자가 홀로 실행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

몽양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 체육인 등으로 활동했다. 근육질의 빼어난 용모에 기질 또한 호방했으며 연설 또한 당대 최고였다. 언론인으로서도 활약했는데, 1936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으면서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사진을 일장기를 지운 채 지면에 싣게 한 사실은 유명하다. 국내외 정세를 보는 식견도 탁월했다. 1944년 일제 패망이 임박했음을 알고 건국동맹을 결성했고, 이는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로 이어졌다. 몽양은 우리 민족 자력으로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이를 위해 친일파를 제외한 모든 세력이 힘을 모을 것으로 호소했다.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의 선봉에 선 것이다.

당시 그의 인지도와 영향력은 대단했다. 해방 직후 우익 언론지 〈선구〉가 실시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설문조사에서 몽양은 이승만(21%), 김구(18%)를 제치고 1위(33%)를 차지했다. 하지만 몽양에 대한 이런 대중의 인기는 좌우의 극단 세력, 특히 분단을 노리는 이들에겐 엄청난 위협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몽양에 대한 10여 차례의 암살 시도는 어쩌면 이런 사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몽양의 장례식은 서거 보름 뒤인 8월 3일 우리나라 최초의 인민장으로 치러졌다. 서울 거리는 민족의 큰 지도자를 잃은 아픔을 저마다의 입장에서 토로하는 각계각층의 만장(輓章)으로 가득 찼다. 문화재청이 당시 만장들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몽양의 유족이 보관해 오던 것으로, 110개가 넘는다. 갈수록 갈등과 분열로 치닫는 지금 현실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좌우 가리지 말고 통합하자던 몽양의 외침을 되새기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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