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푸른 노년의 삶과 시
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칠곡 가시나들’(2019)은 경북 칠곡군 약목면에 사는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연치(年齒)가 평균 86세다. 세월의 풍화에 뼈마디가 녹슨 할머니들이 푸르디 푸른 청춘의 ‘가시나들’로 거듭나게 된 비결은 한글 공부다. 식민지와 해방, 전쟁을 거치는 동안 시대의 파고와 신산한 삶은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이름조차 제대로 쓸 수 없었던 까막눈이의 설움을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었으랴. 할머니들에게 한글이란 세상과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읽고 자식 사랑을 한껏 표현하는 프리즘이다. 자식을 “씻긴 물조차 버리기 싫었을 만큼” 사랑스러웠노라는 오래된 고백과 “밥 잘 먹어라”는 당부는 그대로 시가 되었다.
오늘날 노년세대가 새로운 청춘을 사는 길은 여럿이다. 사하사랑채노인복지관에서는 한국문화원연합회 어르신문화활동지원사업으로 ‘우행시(詩)-우리들의 행복한 시집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다. 지역 내 어르신들과 초등학생들이 시 창작을 매개로 만난다. 어린이들이 도착하자 어르신들은 부채질로 땀을 식히거나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한껏 반긴다. 쉴 새 없는 재잘거림에 일일이 답하느라 정작 시 창작 열의는 잠시 제쳐두어야 하는데도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예산이 넉넉하지 않아 기획자와 사회복지사, 돌봄교사까지 온통 손을 보태야 하는데도 “그래도 좋아요”라며 환하게 웃는다.
오늘날 노년세대는 교육 수준이나 경제적 지위, 사회적 관계와 건강 상태 등에서 이전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취향과 관심 역시 다양하다. 건강과 시간, 경제적 여유 속에서 깊이 있는 인문교양을 지향하는가 하면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자아성취를 추구하기도 한다. 제3기 인생대학(The University of the Third Age)은 이러한 노년세대의 특성을 반영한 운동이다. 1970년대 프랑스에서 은퇴자들에게 대학 수업을 개방한 데서 출발해 영국의 평생교육 체계로 정착하였으며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즈음 우리나라에도 노년세대의 인문활동이나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이 부쩍 늘어났다.
부산은 65세 이상 인구가 총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사회다. 이를 심각한 문제점으로만 인식하기보다는 노년세대의 경험과 지식, 삶의 지혜와 슬기를 나눌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파괴되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는가. 사하사랑채노인복지관의 우행시는 세대론적 공감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노년세대를 단순히 돌봄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저기, 아이들의 손을 맞잡은 푸른 청춘의 노년세대가 걸어온다. 지루한 장마에도 그렇게 아이들의 키는 훌쩍 크고 할머니들의 삶도 시도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