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에어컨이 사라지자 생각나는 것들
김남석 문학평론가
1980년대 한데 모여 여름 보내
음식·모깃불 나누며 함께 견뎌
정다웠던 삶 버린 대가로
에어컨 향유 경제력 얻어
작은 공간은 쾌적해졌지만
바깥의 공유 공간은 파괴
에어컨이 고장 났다. 워낙 오래된 에어컨이었던지라 언제 고장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번 여름만 무사히 넘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기에 실망감 역시 적지 않았다. 직전에 다녀갔던 AS기사가 한 말이 기억이 났다. 가스가 새고 있어 조만간 수리하거나 교체해야 한다는 충고였는데, 기사의 말대로 정말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더위를 날려주던 시원한 바람이 사라지고 간신히 뜨거운 바람만 뿜어내는 에어컨은 곧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더위가 집을 점령했고 습기가 가시지 않은 공간이 되면서, 집 안에서 일을 하는 것도, 책을 읽은 것도, 심지어는 자는 것도 어려워졌다. 왜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로 에어컨이 꼽히고 있으며, 그 위력이 핵의 공포를 알린 원자탄이나 삶의 아이러니를 깊게 체현시킨 〈고도를 기다리며〉에 버금가는지도 저절로 체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에어컨이 이 세상에서 특유의 매력을 뽐내는 시기는 약 100년 남짓이다. 개인 에어컨은 1940년대에 보급되었으며, 한국에서는 1990년대를 넘어서야 에어컨의 진정한 보급이 이루어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에어컨이 없던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아니 어떻게 이 여름을 지냈을까?
탁족하고 파탈한 채 정자에 앉아 있는 선인의 한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우아하게 정자를 차지했고 그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을 즐길 줄 알았던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이 늘어났고,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호사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줄어드는 과정에서 파탈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정자와 같은 사적 공간은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았다. 결국 사람들은 모여 살면서도 더위를 쫓는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모여 살았다. 동네에 모여 살고 마을에 모여 살고 유원지와 산에 모여 지냈다. 돗자리를 펴든 텐트를 치든 평상을 깔든 그들은 그곳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음식을 나누고 모깃불을 나누면서, 무료하지만 견뎌야 하는 시간을 함께 견뎠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서 그 시절 그들의 방식은 요원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시절을 겪은 적이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여름을 나고 있음에도, 그 시절의 방법은 폐기되었다. 모여서 모닥불을 피울 수도 없고, 서먹서먹한 사이에서 수박도 나누어 먹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파탈을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계곡에 발을 함부로 담글 수도 없다. 어쩌면 우리는 그 시절 그렇게 정다울 수 있었던 삶을 버린 대가로 에어컨을 얻고 그 에어컨을 마음껏 켤 수 있는 경제력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대신 그 대가는 참혹할 수 있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에어컨은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 중 하나이다.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은, 그렇게 냉방된 공간 바깥에는 치명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들의 작은 공간만을 쾌적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 바깥의 공유 공간을 파괴하고 있는 셈이며, 결과적으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누어야 하는 공간을 망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에어컨의 위력을 실감하는 시대에서, 과거의 믿음을 함부로 고수하기 어렵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는 더위 속에서 일을 해야 하고,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고, 가족을 돌보아야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이들에게 에어컨을 버리고 과거의 모닥불로 돌아가 함께 더위를 나누면서 그렇게 환경을 보호하자고 말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에어컨이 잠시 없었던 세상에서, 에어컨이 아예 없었던 세상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을 따름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그 과정을 솔직하게 적어보고 싶었다. 잠시지만, 에어컨이 사라지자 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