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녀가 독립 운동을 하게 된 이유는? [부산피디아 ep.9 박차정]
동래일신여학교 동맹휴학 주도
문학적 소질 불구 여전사로 활동
근우회 멤버·남경조선부녀회 결성
임금차별 철폐 등 여성문제도 천착
조선의용대 부녀단장으로 맹활약
전투서 총상 입은 후 34세로 사망
남편 김원봉 월북 행적 영향 ‘홀대’
1995년 독립장 추서 계기 재평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35년간의 암흑기. 일제강점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크고 아픈 상처다. 사회·경제적 수탈은 당연하고 역사 왜곡, 일본식 성명 강요 등 민족 말살 정책을 통해 일제는 대한민국을 지구 위에서 소멸시키려 했다. 폭력적이고 치욕적인 시기지만, 달리 말하면 일제강점기 35년은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여성 독립운동가를 물으면 유관순 열사를 생각한다. 하지만 부산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그해에 태어나 독립을 한해 앞두고 34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숭고한 영웅. 피로 써내려 간 독립운동사의 들꽃, 박차정 의사다.
■ 온 가족이 외친 독립
1910년 5월 박차정은 부산 동래 복천동에서 태어난다. 아버지 박용한과 어머니 김맹련 사이의 3남 2녀 중 넷째. 박차정 의사의 항일 정신은 부모, 형제의 영향이 컸다. 박차정 의사의 가족은 1928년 설립된 동래 성결교회의 교인으로, 일찍부터 민족의식, 남녀평등 정신이 몸에 밴 ‘깨어있는’ 집안이었다.
부친 박용한 선생은 탁지부 즉 오늘날 기획재정부 주사를 역임한 측량기사로, 기록에 따르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자신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에 비분강개해 1918년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
남은 가족은 일제에 강한 반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박차정 의사의 두 오빠 또한 독립운동가다. 큰오빠 박문희 선생은 신간회 동래지회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20년대 의열단 단원으로서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하다 부산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한다. 둘째 오빠 박문호 선생은 주로 중국에서 망명 투쟁을 펼쳤고, 의열단 간부로 활동하던 중 일제에 검거돼 1934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다. 1995년 박차정, 2018년 박문희, 2019년 박문호 의사가 차례대로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는다. 부모, 형제의 강한 항일 정신 덕에 박차정 의사 또한 자연스럽게 마치 숙명처럼,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그의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하고 시작된다.
■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현재 동래여자고등학교인 이곳은 호주장로회 선교계 학교로, 민족정신과 함께 한국인이면 알아야 할 역사, 지리 등의 교과에 교육의 중점을 두고 있었다. 많은 민족 운동가를 배출했고,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 만세운동을 부산에서 일으킨 것도 이 학교 선생과 학생이다. 이런 전통을 가진 학교에 박차정 의사가 입학하니 가정에서 키워온 항일 의식이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차정 의사는 부산지역 학교의 동맹휴학을 끌어냈다. 동맹휴학은 학생운동 중 가장 급진적인 집단행동으로, 학생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독립 투쟁이다. 박차정 의사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연락책 역할을 했다. 박차정 의사의 남동생인 수필가 박문하의 딸 박민애 씨는 “아버지(박문하)와 고모(박차정)는 10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났는데, 고모는 노인으로 변장한 후 어린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함께 학생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 독립운동 전단을 돌렸다”고 했다.
박차정 의사는 글쓰기에도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동래일신여학교 교내 잡지에 ‘철야’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일제강점기 옥사를 한 독립투사 자녀들의 이야기로, 독립에 대한 갈망을 나타낸 그의 자전적 소설이었다. 철야의 주인공 이름인 ‘철애’는 이후 박차정이 가명으로도 사용한다. 박차정 의사는 문학적 소질을 인정받아 등단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여작가가 아닌 여전사다.
■ 페미니스트, 박차정
이후 박차정 의사는 항일여성 운동단체인 근우회에서 활동한다. 근우회는 좌우 연합 독립운동 단체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단체가 모두 참여한 통합 여성 운동 조직이었다.
강대민 전 경성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박차정 의사가 다른 독립운동가와 다른 점 중 하나는 민족해방 운동과 함께 여성해방 운동을 대단히 중요시했다는 점”이라고 했다. 근우회는 행동강령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 철폐’ ‘조혼 폐지 및 결혼의 자유’ ‘부인 노동자의 임금 차별 철폐’ 등을 내세웠다. 박차정 의사는 근우회의 핵심 멤버로 선전과 출판 업무를 담당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다.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해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 사이의 다툼이 발단이 돼 전개된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운동이다. 1930년 1월 박차정 의사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연장으로 서울에서 전개된 여학교 대규모 통합 시위, 일명 ‘근우회 사건’을 배후에서 주도한다. 이화여자전문학교·숙명여학교 등 11곳의 여학교가 참여한 항일 운동은 ‘광주 학생 석방 만세’ ‘약소민족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전개됐다. 주동자로 지목된 박차정 의사는 일제에 의해 구속되고 1930년 출소한다. 국내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낀 그는 의열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의 인도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 약산 김원봉이 설립한 의열단에 합류하게 된다.
■ 독립운동사의 들꽃, 피고 지다
의열단은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 투쟁’이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행한 단체였다. 그들은 일제의 고위 관료를 암살하거나 어용 기관을 타격하는 일에 목숨을 던졌다. 박차정 의사는 1931년 3월 김원봉의 아내가 된다. 이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열단의 핵심 멤버로 활동한다. 강 교수는 “당시 의열단은 레닌 정치학교를 개교해 독립투사를 양성하고 있었는데, 이 학교의 운영과 교육에 박차정이 깊이 개입하게 되고 그게 인연이 되어 김원봉과 평생의 투쟁 동지로 남게 된 것 아닌가 추측한다”고 했다.
1935년 김원봉은 의열단을 비롯해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등 좌우를 망라한 ‘민족혁명당’을 만든다. 박차정 의사는 '임철애'라는 가명으로 민족혁명당의 지원 단체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여성을 독립운동에 전폭적으로 참여시킨다. 창립선언문에서 박차정 의사는 ‘전국의 부녀자가 단결, 무장하여 민족혁명전선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의 여성해방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특히 ‘조선부녀를 봉건적 노예제도에서 속박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이며, 우리 민족을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라며 민족 해방운동과 여성 해방운동을 동시에 강조했다.
단순히 글로만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박차정 의사는 직접 전장으로 나가 총칼을 들고 싸웠다. 1938년 일본의 난징대학살로 인해 중국의 항일의식이 불같이 번지던 시기. 김원봉은 항일동맹군으로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전쟁에 나서며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나선다. 박차정 의사는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으로 활약하는데 22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부녀복무단은 남성들과 함께 싸우며 동시에 보급물자를 전달하고, 전단이나 표어를 만들어 살포하는 활동도 했다. 강 교수는 “일반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며 “몸을 아끼지 않고 투쟁에 앞장섰다”고 했다.
1939년 박차정 의사는 중국 강서성 곤륜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총상을 입는다. 그 후유증으로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5월 27일 서른넷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는 중국 충칭에 있는 화상산 공원묘지에 묻혔다. 해방 후 김원봉은 박차정 의사의 유골을 수습해 자기 고향인 밀양 송악마을 뒷산에 이장한다. 강 교수는 “한국으로 이장되기 전 박차정 의사가 묻힌 그 공원묘지에는 하얀 들꽃이 가득했다”며 “그곳 주민들은 그 꽃을 조선화라고 불렀다”고 했다.
■ 이념 대립에 잊히다
해방 이후 월북한 남편 김원봉의 행적 때문에 꽤 오랫동안 박차정 의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왜곡되었다. 사회주의자로 낙인찍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며 재평가 받는 중이다. 그는 민족 해방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여성 해방운동을 주장한 유일무이한 실천가이자 선구자로 남편 김원봉을 떠나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고 있다. 강 교수는 “박차정 의사는 사회주의 신봉자가 아니다”며 “그에게 계급투쟁이나 노동운동은 민족 운동을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 목적이 아니다”고 했다.
연필 대신 총을 들고, 민족 해방을 위해 싸운 박차정 의사의 숭고한 삶. 남과 북이 대립된 지금의 상황에서 독립운동가의 행적과 업적을 돌이켜 보는 것은 의미가 크다. 강 교수는 “박차정 의사뿐만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가 이념 대립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힘을 합쳐 싸웠다”며 “사회주의 대 민주주의, 보수 대 진보 같은 이분법적인 대립을 넘어 대의를 위한 통합의 모티브를 박차정 의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안타까운 사실도 있다. 박차정 의사를 비롯해 부산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박재혁 의사, 임시정부에 자금을 댔던 백산 안희제 선생 등 부산의 많은 독립투사가 민족 해방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 그러나 부산에는 이 같은 위인을 기억하고 그들의 역사를 집대성한 ‘독립기념관’이 한 곳도 없다.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부산은 외면하고 있는게 아닐까.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