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다른 삶을 살아갈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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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캐나다 출신 가수 레너드 코헨은 1960년에 그리스 히드라 섬에 있는 작은 집 한 채를 산다. 히드라 섬은 수도 아테네에서 배를 타고 2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는 작은 섬이다. 히드라 섬으로 숨어들 때 코헨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가수 코헨이 아니라 시인이자 소설가 코헨이었다. 1960년대 내내 코헨은 그 작은 섬에 칩거하면서 시집과 소설을 출판한다. 지금도 히드라 섬에 가면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골목에 있는 옛집을 볼 수 있다. 개인 소유라서 내부를 구경할 순 없지만, 젊은 코헨이 어떤 분위기에서 창작열을 불태웠는지 짐작할 만하다.

영국 유학 시절 나는 코헨의 광팬이었던 룸메이트의 손에 이끌려 히드라 섬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벌써 햇수로 25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지난달 아테네에서 있었던 학술행사가 끝난 뒤에 나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코헨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제 중년의 쇠퇴를 피하기 어려운 나이가 된 나는 정체 모를 그리움에 이끌려 패기만만했던 나의 한때를 숨겨 두고 온 그 섬에 다시 가 보고 싶었다. 히드라는 헤라클레스 이야기에 나오는 하나의 머리를 자르면 둘이 생긴다는 그 괴물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원래 문자 그대로 읽으면 ‘물’이라는 뜻이다. 형체는 없지만 그럼에도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 물이다.

레너드 코헨이 살았던 그리스의 작은 섬

수십 년 지나도 옛 모습 그대로 간직

기꺼이 불편함 선택 섬 사람들 존중받을 만

기후 위기로 삶터 사라질 위기 안타까워

환경 보전을 위해 히드라 섬 주민들은 자동차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동 수단은 도보 아니면 나귀들이다. 다른 섬으로 가려면 배를 이용해야 한다.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서 피레우스 항구에서 페리를 탔다. 조금 이른 휴가를 나선 관광객을 잔뜩 실은 페리가 히드라 섬에 도착하자 머리 깊숙이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섬의 정경은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 변한 것이 없었다. 가게도 그대로였고 주인들도 그대로였다. 어린아이들은 자라 있었고 새로운 고양이들이 태어나서 그늘에서 늘어지게 잠들어 있었다.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 섬은 지금 그대로 모습으로 영원할 것 같았다. 작은 초등학교에 한국의 도시 어느 동네에서 내가 볼 수 있는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아이들이 모여 공부하고 있었다. 섬에서 자란 아이들의 꿈은 항해사가 되거나 아니면 나귀 조련사가 되는 것이다. 공부를 하려면 육지로 나가서 학위를 따고 해외에서 취업을 하겠지만, 그러다가 섬으로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해변에서 키오스크를 운영하는 한 여성은 독일에서 일하다가 귀향했고, 같은 장소에서 마주친 중년 남성은 놀랍게도 한국 울산에서 일하다가 돌아왔다고 했다.

챗봇이 나오고 인공지능 관련 신기술이 문명의 단계를 업그레이드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쉴 틈 없이 쏟아지던 세계에서 나는 갑자기 아침저녁으로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맞춰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는 과거의 세계로 빠져 들어온 것 같았다. 토끼 굴로 뛰어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가게 주인들은 다 마을 주민이었고, 섬 주민들 중에서 일하지 않는 이들은 유일하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뿐이었다. 며칠 지나니 모두 길에서 마주치면서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랐던 나에게 익숙한 마을 공동체였다. 문득 옛것을 고스란히 보전하고 있는 이 세계가 과연 속도를 생명으로 삼는 현대적인 세계보다 후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편리성을 얻기 위해 포기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소중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만드는 히드라 섬의 일상이었다. 물론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본인들 스스로 불편한 방식을 선택한 삶도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말 그대로 돈의 가치로 모든 것을 재단해서 일률적으로 줄 세우기를 시키는 경쟁 구도가 삶의 다양성을 재단하는 절대적 기준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익숙함을 내던지고 낯선 환경으로 과감하게 나아가는 데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히드라 섬에 머무는 동안 평화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예외 없이 기후 변화의 위기가 이 아름다운 섬을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다행히 로도스 섬처럼 폭염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기온은 연일 40도 이상을 오르내렸다. 우리가 편리함을 위해 내달려 온 그 속도만큼 지켜져야 할 많은 것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음을 새삼 느꼈다. 코헨의 자취가 남아 있는 히드라 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다른 삶을 살아갈 용기가 없다면 지금 이 삶의 방식도 오래 지속하기 어려운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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