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쥬고엔 고주센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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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나가와 일대를 진원지로 한 규모 7.8의 대지진이 도쿄와 요코하마 등 관동지방을 강타했다. 936회의 여진과 쓰나미까지 엄청난 재난이 몰아쳤다. 도쿄는 목재 가옥의 3분의 2가 불에 타고 무너지면서 민심은 흉흉해졌다. 100년 전인 1923년 9월 1일 벌어진 관동대지진 사건이다. 당시 재일 조선인들은 대지진과 함께 대학살이란 불행까지 고스란히 겪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불을 지른다’는 유언비어가 의도적으로 유포되고, 자경단 등이 조선인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조선인이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쥬고엔 고주센’(15엔 50전)을 따라하게 한 뒤 서투르면 죽임을 당했다. 조선인 6000명 이상이 대지진과 화재, 쓰나미가 아니라 분풀이 대상으로 인간에 의해 학살됐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에게 학살됐는지 명확한 진상 규명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일본은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기념하고 있지만, 관동 지역의 재일교포들에게는 ‘조선인 학살 추모일’이다. 매년 어김없이 1~4일에는 곳곳에서 대학살을 가슴 아파하는 일본인과 재일교포 단체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추모·위령제가 열린다. 지난달에는 한국인 희생자 추도식을 매년 거행하고 있는 일본 시민단체가 도쿄도청 고이케 지사가 6년 전부터 추도문을 보내지 않는 것과 관련해, “고이케 지사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도망치지 마라.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제대로 바라봐야 한다”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한일 정상이 오는 18일 미국 캠프데이비드에서 미국 바이든 대통령과 3국 정상회담을 갖는 등 양국 관계가 미래를 향해 급물살을 타고 있다. 100년의 탄탄한 미래를 위해서는 망각이 아니라, 아픈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추모하고, 극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희생됐는지 제대로 아는 것이 ‘감정적인 반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래는 현재, 그리고 과거와 언제나 연결돼 있다. 불행한 사건은 주체만 바뀔 뿐 되풀이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다.

역사 앞에 겸손해지는 방법은 인정과 사과, 그리고 용서이다. 대지진과 대학살 100주기가 3주가량 남아서인지, 혹은 애써 만든 친선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정부 차원의 추모 소식은 그다지 들리지 않고 있다. 그나마 ‘1923년 9월 1일’을 기억하려는 민간 학자들과 양국 시민의 노력이 끊이지 않아 다행스럽다. 100주기를 맞은 억울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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