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모순적 인간
신호철 소설가
세상은 한쪽으로 움직인다. 이 흐름은 모든 물질에 적용되는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뜨거운 것은 차갑게 식는다. 모여진 것은 흩어지고, 멈춘 것은 다시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즉, 모든 것이 균일해져 더 변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세상의 기본원칙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물질이 제 형태를 스스로 만들고, 혼자 움직이고, 심지어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만들게 되었다. 기적도 기적 나름이지 이건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다.
이렇듯 생명체는 세상의 물리법칙과 반대되는 과정으로 탄생했다. 무한대에 가까운 확률을 초월하여,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생명체는 탄생 자체가 모순이다. 이런 생명체의 진화 과정도 엄청나다. 타 생명체를 포식해 양분을 얻는 방식으로 선회한 것부터가 그렇다. 안정과 자생을 넘어서는 이기적 유전자의 탄생인 것이다.
다른 개체를 삼켜 몸을 불린 생명체는 또 한 번 모순적 선택을 한다. 바로 자신의 몸을 구별하여 암컷과 수컷으로 나눈 것이다. 짝을 찾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이 조치는 마치 목적 달성을 위해 우회로를 찾는 탐험가처럼 치밀했다. 이로 인해 본능과 욕망, 혹은 목적과 의지라는 엄청난 모순을 만들어냈다.
생명체는 끊임없이 모순을 생성해 낸다. 그 모순의 정점에 인간이 있다. 어쩌면 수억 년 동안 가장 효율적인 모순에 성공한 덕분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고, 약육강식을 거슬러 약자를 보호하려 한다. 때론 희생적 행동을 서슴지 않고, 무의미한 것에 호기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모순적 행동은 확정된 미래로 가지 않기 위함이다.
바늘 끝에 앉은 한 마리 박테리아에게도 무한한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있다. 선택의 가능성에는 선택적 모순도 포함된다. 선택적 모순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모순이 있고, 상식 이하의 퇴행적 모순도 있다. 이기적이고 퇴행적인 모순의 결말은 인간의 화석화이다. 인간이 공룡이나 암모나이트, 삼엽충처럼 수백만 년 뒤에 화석으로 남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뜻이다.
인간은 번영할 것인지, 자멸의 길로 빠질 건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의 뉴스를 보면 퇴행적 모순이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 같다. 전쟁은 끊이지를 않고 어떤 분쟁지역에선 차마 표현하기 어려운 참극이 벌어진다. 이상기후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폭염과 홍수가 일어난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의 모순도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물론, 세상 어디서든 비극이 일어난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니 나는 방관자가 되기를 원한다. 나에게만 나쁜 일이 생기지 않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개인일 뿐이지 않은가.
방관자 특유의 무책임한 걱정은 나의 일상이다. 퇴행적 모순이 인간을 뒷걸음질 치게 했다면, 긍정적인 모순은 두 배가 더 필요할 것이라 한탄한다. 한탄하면서 우리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꿔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만을 바란다. 나 대신 희생해줄 누군가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나는 아닐 테니 상상도 힘들다.
아내가 멍한 얼굴로 앉은 나를 재촉한다. 나는 고차원적인 사색을 방해받았다는 시늉을 하며 베란다에 쌓인 재활용 쓰레기를 주섬주섬 챙겨 나온다. 페트병 분리수거함에 잘못 던져 넣은 맥주 캔을 다시 끄집어내다 퍼뜩 생각을 떠올린다. 지하철역에 칼을 휘두르는 남자가 나타나면 어떻게 도망쳐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