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적 상상력으로 통영 바다의 37개 무인도 신화 쓰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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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이중도 시인 여섯 번째 시집 ‘고래 서방’
자연 사람 경계 지운 통영 바다 서사 ‘매혹적’
장재도·대혈도 등 섬 이야기로 새로운 눈 열어

윤이상기념관에 근무하는 이중도 시인은 통영 바다의 로컬리즘을 천착하겠다는 생각으로 여섯 번째 시집 <고래 서방>을 냈다. 이중도 제공 윤이상기념관에 근무하는 이중도 시인은 통영 바다의 로컬리즘을 천착하겠다는 생각으로 여섯 번째 시집 <고래 서방>을 냈다. 이중도 제공

한려수도 통영 바다가 씻긴 듯 아름답다. 그 바다는 국운의 절명을 이겨낸 이순신의 바다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신화적으로 장대하고 웅숭깊다. 그것을 어떻게 발견해야 하나, 라는 질문에 답하듯 삼국유사 같은, 마르케스 ‘백년 동안의 고독’ 같은 신화적 마술적 세계가 펼쳐진다. 경남 통영시 이중도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고래 서방>(천년의 시작)은 통영 바닷속에서 들끓던 언어들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파도처럼 밀려오는 ‘이야기 시집’이다.

이 시집에는 37개 무인도가 나온다. 그곳들은 사는 사람은 없으나, 통영 바다에 분명한 이름과 아스라한 점으로 존재하는 섬이다. 대구을비도 외거칠리도 소두방도 솔여도 반화도 등은 통영 바다를 점점으로 만들고 있는 이름들이다. 이중도 시인은 “통영에 570개 섬이 있는데 그중 상상력을 지펴 올리는 37개 무인도를 시의 공간으로 삼아 3년에 걸쳐 썼다”고 했다.

그가 무인도를 택한 것은 시적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고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욕지도 위쪽 ‘막도’에 ‘막 나가는’ 일이 벌어진다. 이곳에 ‘짝불알 집안’과 ‘짝다리 집안’이 사이좋게 섞여 사는데 어느 추석날 저녁 술판 끝에 난데없는 개망나니 같은 말 때문에 두 사내가 멱살잡이를 하다가 도끼를 들고 추격전을 벌인다.

‘가없는 밤바다의 등판에서 반짝거리는 무수한 달빛의 파편들이 눈에 확 들어오는 지점에 이르러/마지막 힘을 짜낸 짝다리의 도끼날이 짝불알의 머리통에 닿으려는 찰나’ 마술 같은 세계가 펼쳐진다. 조상 무덤 하나가 황급히 열려 도망치던 놈을 품에 안았고, 추격하던 놈은 무덤의 정수리를 딛고 그대로 달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추석 달밤의 추격전’). 무덤이 열린다는 것은 삼국유사와 서정주의 상상력이고, 달 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통영 바다의 상상력이다.

37개 섬 중 ‘내죽도’는 다르다. 광도면 일대가 매립돼 지금은 육지가 된 곳이다. 하지만 21편의 시가 되었는데 내죽도가 시인의 고향 앞바다 섬이었기 때문이다. ‘원문만’에 자리한 그의 고향은 전주 이씨 동족촌이었다. 어릴 적 보고 듣고 체험했던 그 촌락의 집단 상상력, 사람과 자연이 경계를 지우고 한통속이 되는 동아시아적 상상력이 시의 밑천이 됐다는 것이다. 잠도 허리에 있는 샘의 뿌리는 지리산 천왕할매가 마시는 샘에 닿아 있다거나, 갈리도 땅속 깊은 곳에 심장처럼 생긴 거대한 연못이 출렁거릴 때는 섬의 젊은 남녀들 속 작은 연못도 함께 출렁거린다는, 회복해야 할 우리의 상상력이 그것이다.

이중도 시인의 <고래 서방>. 천년의시작 제공 이중도 시인의 <고래 서방>. 천년의시작 제공

작은 촌락이 품은 동아시아적 상상력, 그래 이런 것이다. 한산도에 딸린 장재도에 거의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 비결은 150년 이상 된 뒷간들에 있다. 이 ‘늙은 변소들’은 ‘자기 입에 똥을 싸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낱낱이 알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이 있고 그 ‘비밀들이 목젖까지 차오르면/(똥은)똥장군에 퍼 담겨’ 남새밭에 뿌려지는데 사람들이 ‘똥물을 먹고 자란 채소를 먹으면/똥을 눈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 다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 섬에서 가장 놀라운 존재는 이 집 저 집 채소를 두루 뜯어먹고 다니는 중매쟁이 염소’다. 그 염소는 ‘마음이 통해 있는 처녀와 총각을 발견하게 되면’ 남자 집과 여자 집을 번갈아 오가며 그 마당에 앉아 사흘간 되새김질을 한다는 것이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육 일간의 되새김질을 통해 확증되면/이들의 혼사를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섬의 법도다(‘이러한 채소의 신비한 효능은’).

서울대 법대를 나와 20년 서울 생활을 하고서 2011년 귀향한 이후 10여 년 윤이상기념관에 근무하고 있는 그는 지역, 로컬의 상상력을 깊숙이 천착하고 있다. ‘수도에 살 때는/놀아보려고 악을 썼다/남쪽에 사니/저절로 놀아진다’는 그는 ‘파도 같은 시인이 되겠다’고 진작 마음먹었다. 그래서 내처 통영 바다로 나아가는데, 그 바다는 경계인 윤이상이 쓰시마에서 배를 저어 와 그토록 닿고 싶어한 ‘고향 바다’이다. “윤이상, 마르케스, 윌리엄 포크너, 모옌 등의 공통점은 로컬리즘이다. 특히 윤이상은 통영의 자연과 바다를 예술로 승화한 분”이라고 그는 말한다. 윤이상 예술의 로컬리즘이 그의 문학적 지향점이다.

한산도 왼쪽에 있는 ‘대혈도’ 이야기도 매혹적이다. ‘염소 똥에 새겨진 이름’을 읽어내 짝을 점지하는 신통력을 지닌, 앞을 보지 못하는 처녀와, 칠삭둥이가 맺어져 혼례를 올리던 날, ‘삼백 살 신갈나무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족두리에 얹히자마자 신부의 눈이 번쩍 떠졌’다고 한다(‘불알에 처녀의 이름을 적어’). 그의 시가 신갈나무 이파리처럼 떨어져 독자에게 닿을 때 ‘이야기로 출렁거리는’ 통영 바다에 대한 새로운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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