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해양경찰 창설 70주년 맞이하여
9월 10일은 해양경찰의 날이다. 올해로 창설 70주년을 맞는다. 1953년 12월 23일 해군으로부터 180톤급 경비정 6척을 인수하여 ‘부산시 중구 중앙로 4가 17-9번지’에서 해양경찰대를 창설하였다. 창설될 당시만 해도 임무는 단순하였다. 평화선을 침범하는 외국 어선을 단속하고, 어족 자원을 보호하는 경비 임무였다. 한국전쟁 직후 혼란기를 틈타 일본 어선이 빈번하게 우리 해역에 넘어와 불법 어로를 자행하는 등 해양 주권을 침해하였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창설 70주년이 된 해양경찰은 1만 4000여 명의 직원과 350여 척의 함정을 가진 종합 행정기관으로 성장하였다. 바다에서 치안, 소방, 안보, 국경 관리, 구조 안전, 환경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한다. 실로 ‘떠다니는 바다 위의 정부’라 하겠다. 이렇게 발전하기까지는 여러 좌절과 아픔도 있었다. 1953년 내무부 소속으로 창설된 이후, 상공부 산하로, 다시 내무부로, 경찰청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가, 1996년 해양수산부가 설립되면서 그 아래 외청으로 독립하였다. 2014년에는 세월호 참사로 해체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863함, 72정 침몰 사건이나, 고 박경조, 고 이청호 순직 등 희생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국민의 기대와 걱정 속에서도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해양경찰의 존재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해양 주권을 수호하는 것이다. 해양경찰 작용을 역사 속에서 찾기는 어렵지 않다. 장보고 대사의 ‘청해진’(淸海鎭)은 성격상 해양 치안 기관이었다. 828년 창설된 청해진은 외적을 물리치는 군사적 임무보다는 해상 질서를 어지럽히는 해적을 퇴치하는 해양 치안 임무를 수행하였다. 청해진이라는 명칭은 ‘널리 바다를 깨끗하게 한다’라는 의미이다. 즉, 해적을 깨끗이 소탕하여 무역로를 보호하고, 안정된 해상 치안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해양경찰청의 미션인 ‘깨끗하고 안전한 희망의 바다’와도 같은 의미이다. 이렇게 청해진에서 했던 일은 오늘날 해양경찰이 수행하는 임무와 같았다. 그러고 보면 청해진은 해양경찰의 원조였고, 장보고 대사는 초대 해양경찰청장이었다고 할 만하다.
조선 영조 30년(1754)에는 백령도 황당선 사건이 있었다. 황당선은 낯선 이국 선박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배들은 서해 5도와 황해도에 자주 출몰하여 불법 어로를 하였다. 관헌이 황당선으로부터 중국인을 추포하자, 인근 배의 중국인이 떼를 지어 몰려와 겁박한 사건이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황당선의 약탈 행위를 막거나 이국 선박이 연안에 접근하는 것 자체를 봉쇄하는 추포무사(追捕武士)와 추포군(追捕軍)을 운용하였다. 오늘날 서해 5도에서 중국 어선을 단속하는 서해 5도 특별경비단과 흡사한 조직이었다.
해양경찰은 먼 바다에서 험난한 파도와 싸우며 일한다. 국민의 눈길이 가까이에는 없지만, 해양경찰은 바다에서 불법 어선을 잡고, 불을 끄고, 조난자를 구한다. 우리 해역을 순찰하며, 해양 환경을 지킨다. 국민 생명 보호와 해양 주권 수호를 위하여 광역적이고 통합적이며, 자연 제약적이고 국제적인 임무를 수행한다. 기꺼이 일정다역(1艇多役)의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9월 10일은 그런 해양경찰이 칠순을 맞는 날이다. 해양경찰은 사기를 먹고 산다. 해양경찰이라는 배는 국민의 격려와 칭찬 없이는 항해할 수 없다. 오늘만큼은 해양경찰의 손을 잡고 어깨를 다독이며 칭찬해 주자. 바다로 나아갈 에너지를 주고 마음의 연료를 넣어주자. 그러면 그것이 우리 바다를 지키는 원천이 될 것이다. 우리 바다를 지키다가 순직한 고 이청호 경사의 결기처럼 해양 주권 수호의 굳은 의지로 변할 것이다. “저 수평선을 넘어오는 외국 어선을 보면 피가 끓습니다. 이 바다가 누구의 바다인데….”(인천 해경 함정 부두에 적혀진 고 이청호 경사 흉상의 글귀 중에서).
고명석 부경대 해양경찰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