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이재명 혁신안, 박근혜 혁신안
박석호 서울정치팀 부장
민주당 혁신안 논란 상대의 ‘가죽’ 벗기기 싸움
2005년 한나라당 혁신안은 당 대표에게 비수
박근혜, 불리한 경선룰 알면서도 전격적 수용
혁신(革新)의 혁(革)자는 ‘가죽’을 뜻한다고 한다. 육체의 가죽을 벗겨내 새롭게 할 정도로 자신에게 가혹한 일인 것이 분명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혁신위원회를 구성해 쇄신에 들어갔다. 하지만 혁신안을 놓고 친명(친이재명)계와 비명계가 다투는 것을 보니 이건 자신의 가죽을 벗겨내기보다는 상대방의 가죽을 벗기려는 권력 싸움에 다름 아니다.
우리나라 정당들은 선거 패배로 위기에 처하면 너나 없이 혁신위원회를 만들어서 당을 바꾸겠다고 한다. 20년 넘게 정치권을 취재한 기자가 볼 때 자신의 가죽을 벗겨낸 혁신안다운 혁신안이 나온 것은 단 한 번뿐이었지 않나 싶다.
2005년 한나라당의 혁신안이다. 당시 한나라당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 여론의 역풍을 맞아 백척간두에 섰다. 그 직후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참패가 불보듯 뻔했으나, 비상전권을 쥔 박근혜 대표 등장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전체 의석 과반을 넘는 152석을 차지했음에도 121석을 건져낸 것이다.
당시 박 대표는 사실상 한나라당을 장악했고, 현상만 유지하면 차기 대선에서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대선 후보 선출에 당원들만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대표는 그런 방식으로는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없고, 정권교체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당의 체질도 바꾸고, 정권 교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혁신위원회를 구성해 대변신을 맡겼다.
혁신위 인적 구성부터 파격적이었다. 홍준표 현 대구시장이 위원장을 맡았다. 박형준 부산시장도 혁신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때만 해도 홍 위원장은 모래시계 검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지만 검찰에서는 ‘독고다이’로 불렸고, 당에 와서는 지도부의 명령도 씹어서 뱉어버리는 ‘꼴통’이었다.
두 사람 모두 박 대표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뚜렷한 반대파였다. 홍 위원장은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 나와 박 대표와 직접 경쟁했다. 박 위원은 2년 뒤 박 전 대통령을 꺾고 대선 후보를 쟁취한 이명박 캠프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다.
이들이 내놓은 혁신안은 그야말로 ‘박근혜의 가죽’을 벗기는 내용으로 가득 찼다.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일반 국민 참여를 50%까지 늘렸다. 또 대선 1년 6개월 전에 당권과 대권을 분리하도록 했다.
한나라당을 안정적으로 관리해 온 박 대표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혁신안이었다. 친박(친박근혜)계는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6월에 성안작업이 끝난 혁신안은 11월까지 당헌·당규에 반영되지 못했다. 그해 8월 30~31일 이틀간 밤을 새우면서 10시간 넘게 진행된 마라톤 회의는 당의 분열을 재촉하는 듯했다. 혁신위원장 홍준표는 “대표는 혁신위에 간섭말라”고 친박계의 외압을 차단했다. 그는 심지어 “혁신안이 시행되면 기존 당대표 임기는 중단된다”면서 박근혜의 대표직 사퇴까지 거론했다.
박 대표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혁신안을 받자니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는 격이고, 거부하자니 비주류의 반발이 만만찮았다.
당시 박 대표와 가까운 인사의 전언은 이렇다. “대표(박근혜)는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결론을 내렸다. 첫째는 당이 깨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어느 안이 정권 교체에 더 도움이 되는지였다.”
그해 11월 14일 한나라당 의원총회가 열렸다. 친박들은 표결을 해서 혁신안의 운명을 정하자면서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박 대표는 이들을 외면하고 전격적으로 혁신안 수용을 선언했다. 박 대표는 “의원 여러분이 대부분 혁신안 원안대로 가겠다고 결정한 것으로 느꼈다”며 “굳이 표결하지 않고 혁신안 원안대로 가자”고 정리했다.
20년 전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지금의 민주당뿐만 아니라 어느 정당이라도 혁신 작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할 사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 혁신작업은 인선부터 고만고만했다. 혁신위원장으로 처음 거론됐던 이래경, 노인폄하 논란을 빚은 김은경 혁신위원장 모두 이 대표의 가죽에 칼을 댈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김은경의 혁신안은 이 대표의 가죽을 벗겨내기보다는 오히려 그 가죽 위에 갑옷까지 입혀준 꼴이다. 혁신안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혁신의 최종 목표가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민주당의 내년 총선은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