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쓸쓸한 너의 아파트”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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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으로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아파트 한 채만 남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주연 배우 이병헌이 이런 설정을 주변에 이야기했더니 “그 아파트 시공사가 어디냐”라는 질문이 돌아왔단다. 사실 이 허무맹랑한 설정을 바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엄태화 감독은 비주얼로 한 컷에 이해시키고 싶어서 여러 장소를 로케이션하다 부산까지 왔다고 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부산 사하구 당리동에 가 봤더니 산 바로 밑에 지은 아파트가 있었다. 그런 위치라면 산이 지진을 막아줄 수도 있겠다 싶었다”라고 했다.

하필이면 아파트가 배경인 이유는 한국인에게 아파트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2021년 기준으로 전체 2145만 가구 중 아파트에 거주하는 가구는 1114만 가구로 51.9%였다. 연립과 다세대까지 합친 공동주택은 1358만 가구로 전체의 63.3%를 차지했다. 한국인은 아파트에 산다. 좁은 국토에 인구가 많으니 아파트에 사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처음 한국에 와서 아파트단지의 거대함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대단지 아파트가 복잡한 도시 문제와 도시 폭력의 상징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쓴 〈아파트 공화국〉은 “나는 어떻게 이런 대단지 아파트가 양산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박사 논문의 주제로 삼기로 마음먹었다”라고 시작한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재테크를 위해 사는 곳이 되었고, 이제 그 아파트가 차별을 양산하고 있다. 임대아파트 차별 문제는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A아파트 단지는 임대동과 분양동 사이에 주민들이 오갈 수 없게 외벽이 설치되고, B단지는 분양동과 임대동을 철조망이 가로지른다. 최근에는 분양동과 임대동의 출입구를 따로 만드는 방식으로 서로 마주칠 일이 아예 없도록 만든다. 아이들은 아파트 이름 뒤에 ‘거지’를 붙여 ‘××거지’라고 부른다.

영화는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산자락 아래 오래된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그 주변에 새로 지어진 드림 팰리스 사람들에게 무시와 차별을 당하다 어느 날 세상이 뒤집히고 만다. 발레리 줄레조는 책 말미에 “대단지 아파트가 한국에서는 미래에도 여전히 성공의 모델로 남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출근길에 회사 옆 아파트 입구에서 만난 ‘외부인 출입금지’ 팻말이 오늘따라 더 커다랗게 보인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같은 좋은 영화가 나오는 현실이 슬프다. 쓸쓸한 너의 아파트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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