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가야사 연구복원, 멈춰선 안 된다
국정과제 준하는 수준으로 정부 지원 체계 확충해야
가야 고분군 세계유산 유력
근래 연구실적도 괄목 성장
국가 차원 지원 결정적 역할
현 정부 들어 국정과제 제외
관련 사업 동력 크게 떨어져
이념 무관한 국책사업 돼야
유네스코(UNESCO,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는 다음 달 중순께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를 연다. 이 행사가 주목되는 건 여기서 가야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등재된다면 이는 우리나라 역사·고고학계의 쾌거라 할 수 있다. 잊혔던 가야사의 실체와 가치가 비로소 국내외에서 인정받게 되는 전기가 되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이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요청한 가야 고분군은 경남 김해시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해 함안군 말이산고분군 등 모두 7개다. 현재로선 등재가 유력하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유네스코 자문심사 기구인 이코모스(ICOMOS,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도 지난 5월 가야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를 유네스코에 권고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최근 일각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유네스코는 세계유산 등재 조건으로 심사 대상 유물·유적에 대한 해당 국가의 보전 의지를 중시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 들어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에 대한 의지가 이전 정부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이런 모습이 자칫 가야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넓어진 연구 지평
가야 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 거론되는 단계에 이른 건 우리 학계에서 가야에 대한 연구가 근년에 크게 활발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에 비해 질과 양에서 향상된 연구실적을 축적했다는 이야기다.
가야사학회의 자료에 따르면 과거엔 많아야 한 해 두 자리 숫자에 불과했던 가야 관련 연구논문 발표 건수가 2021년 120여 건, 2022년 130여 건으로 근래 확실한 성장세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연구자료로서 신뢰도가 높은 한국연구재단(KCI) 등재 논문은 2021년 21건에서 2022년에는 34건으로 1.5배 이상 증가했다. 논문만이 아니라 가야 관련 고고학 학술대회도 2021년 21건, 2022년 19건으로 예년에 비해 크게 늘었다.
이 연구들은 또 김해 등 기존에 알려진 가야 유적 분포지를 벗어나 전북 장수군 등 호남 지역까지 연구 범위를 넓혔으며,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중소 규모 고분과 관방(국경의 군사보호시설 등) 유적까지 조사해 고대 가야의 실체를 더욱 다층·다면적으로 조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괄목할 만한 성과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가야사는 ‘베일에 가려진 신비의 제국’이라 불릴 만치 우리 역사에서 소외된 채 제대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사정이 이렇게 달라진 데에는 정부 차원의 집중적인 지원과 의지가 결정적으로 작용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문재인 정부가 국정과제로 추진했던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이 특히 그렇다. 부실한 예산 집행이나 지자체별 이벤트식 사업 추진 등에 대한 갖가지 비판도 제기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사업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일궈낸 것이다.
가야사 연구 지원은 이전 정부 때도 있었다. 그 규모는 김대중 정부 때 1279억 원, 박근혜 정부 때 339억 원에 달했다. 문재인 정부는 규모를 크게 키워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에 30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했다. 이 같은 지원 속에서 영·호남 지역 30여 곳의 가야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추진됐고, 거기에 각 지자체의 호응까지 더해지면서 전에 없던 결과를 가져왔다. 이 기간 가야 고분군 6곳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됐으며 보물급 유물도 숱하게 출토됐다. 국책사업으로 진행된 덕에 가야사에 대한 관심이 전문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까지 새롭게 전해진 것은 또 다른 성과였다. 가야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은 이처럼 정부, 지자체, 학계, 국민의 합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크게 떨어진 동력
하지만 지금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은 동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다. 윤석열 정부 들어 해당 사업이 국정과제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가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지는 않다. 지난해 9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한덕수 국무총리도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이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문화재청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국정과제에서 뺐다는 건 그만큼 해당 사업을 중시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한 총리의 이날 발언에선 그 어떤 열정이나 적극성을 찾기 어려워 의례적인 수사에 그쳤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후 어떤 형태로든 가야사에 대한 정부 차원의 관심과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조치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이 때문에 윤석열 정부에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의 중단 없는 추진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경남도 의회도 지난해 9월 ‘국가정책의 연속성과 일관성 확보 차원에서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을 지속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의 대정부 건의안을 의결했다. 하지만 지금껏 그에 대한 답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있다.
■정부 지원 필수 국책사업
현재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은 2020년 6월 제정된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를 둔 ‘제1차 역사문화권 정비기본계획’에 따라 추진되고 있다. 정부 예산이 들어가는 국책사업인데, 이는 결국 정부의 의지에 따라 흔들릴 여지가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건 그 부분이다. 정권이나 정치적 이념에 따라 국책사업이 축소되거나 멈춰 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잊힌 역사의 연구복원은 단기간에 끝낼 일이 아니라 장기적 안목에서 다양한 사업이 폭넓게 진행돼야 하기 때문에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은 필수적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올해 들어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은 지지부진하다. 뚜렷한 연구 성과나 유의미한 발굴이 있었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특별법이 명시한 가야 문화권역별 정비 사업 추진도 언제 어떻게 시행될지 오리무중이다. 학계에서 시급하게 요구하는 가야사 연구 기반의 저변 확대도 요원하다.
■국정과제 준하는 책무
이러는 사이 가야의 정체성을 놓고 연구자들 사이에서 갈등만 높아지고 있다. 강단 학계와 재야 학계가 개방적인 논의나 객관적인 검증 노력은 없이 서로 상대방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옳고 그름에 앞서 이러다가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 자체가 배가 산으로 가는 격으로 엉뚱한 결말을 맺는 건 아닌지 우려되는 지경이다. 일이 이렇게 흘러서는 안 된다. 전환의 계기가 필요하고, 거기에 정부가 중심을 잡아 줘야 한다.
가야사가 우리 역사의 곁가지가 아니라 영호남을 아우르는 당당한 본류임은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서 이미 실증적으로 드러났다. 요컨대 가야사를 연구하고 복원하는 일은 탈락된 고대사의 퍼즐을 채움으로써 우리 민족의 온전한 뿌리를 찾는 과정인 것이다. 어느 정부가 됐든 이념이나 진영을 따지지 말고 반드시 완수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윤석열 정부는 국정과제에 준하는 수준으로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의 지원 체계를 새롭게 확충해야 할 것이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