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다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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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희 (사)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폭우로 인한 지하차도 참사 반복
노동자 사망 사고 작업 환경 문제
사고도 반복되면 우연이 아닌 사건
‘다음 소희’ 실적 위주 시스템 성찰
중대재해처벌법 기소는 단 1건 불과
처벌보다 더 중요한 건 구조적 개선

사건(事件)과 사고(事故)는 자주 함께 쓰는 말이지만 다른 뜻을 품고 있다. 영어로 ‘사고’는 accident라고 쓰는 반면 ‘사건’은 주로 incident라고 쓴다. 사고가 어떤 의도가 없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일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면, 사건은 역시 평소에 없었던 뜻밖의 일이지만 의도나 고의성을 갖고 벌어진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고라 하더라도 막을 수 있었던 일을 막지 못할 때,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고가 반복될 때,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폭염과 폭우로 재난이 일상이 되었던 여름, 오송지하차도 참사는 3년 전 벌어진 부산에서의 초량지하차도 참사를 떠올리게 했다. 시민들의 신고에도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누군가는 또다시 이태원 참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기시감을 견디며, 우리는 우리 앞에 벌어지는 사고 속에서 더 이상 우연적인 요소만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얼마 전 파리바게뜨로 유명한 SPC그룹의 한 계열사 빵 공장에서 끼임 사고가 발생해 50대 여성 노동자가 숨졌다. 또 다른 계열사의 공장에서 20대 여성 노동자가 끼임 사고로 숨졌던 일이 불과 10개월 전이다. 다른 공장에서도 손가락 끼임과 골절 사고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사고 경위와 원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의문점들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고 경위를 파악할수록 어떻게 한 사람의 목숨이 오갈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설비가 충분한 안전장치나 안전 수칙 없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 때문에 많은 언론과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이번 사안이 기업 경영 및 생산방식에 기인한 구조적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20대 여성 노동자의 사망 사건 경위를 밝히는 과정에서 장시간 노동이 한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12시간 맞교대로 일하면서 휴무일조차도 카톡 선착순으로 신청해야만 했던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었다’고 말한다. 그뿐인가. 사고가 일어났던 그날에도 기계를 흰 천으로 덮은 채 공장은 계속 가동되었다. 동료가 죽은 자리에서 노동자들은 밤새 샌드위치를 만들어야 했다고 한다. 이번 사고로 숨진 노동자 역시 하루 11시간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의당 이은주 의원실과 ‘파리바게뜨 노동자 힘내라 공동행동’에서는 법률 검토 내용을 발표하면서 처음부터 안전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았다. 공정의 안전표준작업서에는 리프트 설비의 위험 요소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음에도 위험에 대한 작업 안전 수칙이나 관리 기준이 없었다고 밝혔다. 안전보건교육은 형식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안전 수칙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설비 가동 시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안전장치도 충분하지 않았다. 장시간 노동의 피로를 견디지 못한 상황 속에서 안전장치도 없이 24시간 돌아가는 빵 공장에서 사고는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최근 OTT로 보게 된 정주리 감독의 영화 ‘다음 소희’는 우발적 사고라 여겨질 수 있었던 한 죽음이 사실상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영화는 2017년 전주의 한 특성화고등학교와 콜센터에서 일어난 실화를 다루고 있다. 고등학생 ‘소희’는 학교의 현장실습으로 대기업의 하청업체 콜센터에서 일을 하면서 고객들의 폭언과 업무 실적 압박에 시달리다 자살을 택한다. 소희를 보호해 주는 안전장치는 어디에도 없었다.

학교는 자신이 현장실습 보낸 학생이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청업체는 진상 고객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콜센터 노동자들의 실적을 압박하고, 대기업은 조금이라도 더 이윤을 짜내기 위해 하청업체를 압박한다. 학교와 교육청은 취업률을 높여 지원금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기 위해 학생들을 일터로 내몰았다. 어제까지 같이 일하던 동료의 죽음 앞에서도 콜센터는 영업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죽음이 흰 천으로 덮인 빵 공장에서처럼, 영화를 보는 내내 기시감이 밀려온다. ‘소희’의 죽음을 수사하던 형사는 말한다. “학생이 일하다 죽었는데 누구 하나 내 탓이라는 사람이 없어.”

지난해 부산에서 발생한 산재 사망 사고는 30여 건에 달한다고 한다. 추락과 깔림, 끼임 사고로 매달 2명 이상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중대재해처벌법에 의해서는 단 한 건이 기소되었다. 처벌과 기소만큼이나 노동환경의 구조적 개선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콜센터 현장에서, 빵 공장에서 벌어진 이 사고는 개인에게 일어난 개별적이고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다. 이미 과거에 반복되었지만 앞으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사회적 사건이다. 다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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