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사키 기자의 눈] 잊히는 전쟁 상처… 더 늦기 전에 평화의 고귀함 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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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사키 사야카 서일본신문 기자

1945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김광자 씨의 가족 사진. 1945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김광자 씨의 가족 사진.

일본 언론인의 눈에 비친 한국과 부산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 3월부터 〈서일본신문〉의 교환기자로 부산에서 근무 중인 이와사키 사야카 기자가 고정 칼럼 ‘이와사키 기자의 눈’을 〈부산일보〉에 연재한다. 한국과 부산을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전망이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겪은 전쟁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할머니는 얘기하길 꺼렸지만 말해 달라고 조르면 마지못해 담담하게 말했다. 할머니 당신은 여학생 시절 학도로 동원돼 군수공장에서 군복을 만들었고, 적지(赤紙)로 불리던 군 소집영장이 와 전쟁터로 향한 오빠 2명은 전사했다는 사연이었다. 말끝에는 으레 “전쟁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고 되뇌었다. 그 할머니는 지난 6월 94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또 한 명의 전쟁 경험자가 사라졌다.

매년 8월이 되면 일본 신문은 평화를 호소하는 기사로 지면을 가득 채운다. 일본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했던 과거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죽은 자들을 애도하며 전쟁 포기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과 9일, 그리고 패전한 8월 15일은 반드시 기억돼야 한다. 일본 신문은 이러한 생각을 다음 대에 이어가기 위해 전쟁의 참화를 알리고 평화의 고귀함을 알리는 기사를 우직하게 써내고 있다.

올여름 1945년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시인 김광자(80) 씨를 부산에서 만났다. 나가사키 태생인 김 씨는 2세 때 폭심지에서 약 2km 떨어진 지점에서 부모와 함께 피폭됐다. 화상을 입고 유리와 나뭇가지가 몸에 꽂혔다. 오른쪽 다리나 왼쪽 옆구리에는 지금도 상흔이 남아 있다.

귀국 후에도 피폭의 영향은 김 씨를 따라다녔다. 딸이 겪을 결혼 차별을 두려워한 김 씨 부모는 “나가사키 출신이라고 남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고, 김 씨는 지금은 세상에 없는 남편에게조차 피폭자인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시인으로서 실력을 키워 원폭 시를 짓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여동생들에게 영향이 미칠까 두려웠다. 시간이 흘러 세 여동생은 결혼했고 부모도 세상을 떠났다. “이제 숨기지 않아도 된다. 원폭의 무서움을 시로 써서 세계에 알리고 싶다”며 김 씨는 올겨울 나가사키를 재방문해 시 구상을 가다듬을 계획이다.

기자 개인적으로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을 몇 번이나 방문했지만 피폭자로부터 직접 체험담을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폭 피해는 폭발로 끝나는 게 아니다. 수십 년이 흐른 현재도 진행 중이다. 오랜 세월 몸을 옥죄는 방사선 피해, 피폭자 차별에 대한 공포, 해외에 잘 닿지 않았던 일본 정부의 피폭자 지원…. 김 씨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박혔다.

원폭 투하 78년이 지난 지금도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러시아의 핵 위협 등 핵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피폭자의 평균 연령은 85.01세(지난 3월 말 현재). 피폭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역사의 풍화를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기자로서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전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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