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된 옛길도 부동산 광풍 앞에선 무력했다”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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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백 년 길, 오 년의 삭제/이준영

2018년과 2023년 ‘부산의 길’ 답사
영화 ‘친구’에 나온 장고개로 등 21곳
부동산 개발에 스러져 가는 현실 조명
“위령제라도 지내는 심정으로 걷고 써”

철거 전 고색창연했던 부산 서구 아미동 은천교회. 호밀밭 제공 철거 전 고색창연했던 부산 서구 아미동 은천교회. 호밀밭 제공

철거 뒤 철근 콘크리트도 짓고 있는 은천교회 모습. 호밀밭 제공 철거 뒤 철근 콘크리트도 짓고 있는 은천교회 모습. 호밀밭 제공

도심의 옛길은 인간 삶의 정취와 역사, 지역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하지만 요즘 도심의 옛길들은 자본논리로 무장한 재개발 재건축 사업에 의해 해체되고 사라져가고 있다. <부산 백 년 길, 오 년의 삭제>는 부동산 광풍에 신음하는 부산의 길을 찾아간 현장 답사기이다.

오랜 시간 <부산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했고, 현재는 일선 선임기자로 활동하는 저자는 부동산 개발에 스러져 가는 부산의 길 21곳을 주목했다. 재개발과 아파트 공사로 황폐해진 곳, 우후죽순 들어서는 건물에 밀려나고 지워진 옛길에 담긴 추억과 사연, 과거와 현대, 변화와 정체 사이에 놓인 다양한 도시의 흔적을 다뤘다. 저자는 2018년에 한 번, 2023년에 또 한 번 부산의 곳곳을 걸었다. 첫 답사와 조사·확인 절차를 합하면 100만 걸음에 가깝다. 오 년이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부산의 길이 지워졌는지, 무엇이 사라졌고 무엇이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지 톺아보았다. 저자는 자본과 욕망의 굴레 속에 처참히 삭제되어 가는 도시의 면면을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비추며,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 가야 할 길에 자연, 공존, 역사 등의 가치가 담겨야 함을 역설한다.

저자는 “그토록 집요하게 옛날 모습을 지탱했던 옛길도 부동산 광풍 앞에서는 무력했다. 백 년 길이 불과 오 년 만에 손을 드는 현장이었다. 최근의 오 년은 거대한 변형의 ‘시간적 형상’이다. 이 글은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 간 길을 담은 기록이다”라고 했다.

저자가 5년 만에 다시 찾은 옛길은 저마다 변형과 파괴의 현장이었다. 부산 서구 아미동 언덕길을 오르다 눈길이 휘둥그레졌다고 한다. 오 년 전 답사 때 올려다보이던 고색창연한 은천교회는 어디로 가고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은천교회는 한국 전쟁 당시 ‘피란민의 성지’로 일컬어지던 곳. 은천교회는 애초 천막으로 시작했고, 1955년에 석조 건축물을 건립했다. 이 교회는 한국 전쟁 당시 아미동에 정착한 피란민의 젖줄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교회 건물은 부산에서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1950년대 석조 건축물로 등록 문화재 수준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다. 사각의 화강암으로 벽체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으며 입구는 아치형으로 멋스럽게 축조한 고색창연한 건물이었다. 이 유서 깊은 건물이 67년 역사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새로 아파트를 지으면서 진입로 확장을 위해 2021년에 은천교회를 철거한 것이다. 철거 전 피란 수도 부산의 역사가 담긴 석조 교회 건축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무시되고 말았다. 그만큼 아파트 광풍은 거세고 무자비했다.

초량동 일본식 가옥인 다나카 주택도 마찬가지다.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부산 역사가 오롯이 담긴 보물 창고로 평가받는 이 가옥은 아파트 단지에 포위돼 있다. 그 앞길은 정다운 골목길이었다. 부산 동구 수정동에서 부산역까지 산책을 즐기던 사람들의 보고였다. 지금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입구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있을 뿐이다.

영도구 동삼동패총전시관 너머엔 오 년 전 보이지 않던 고층 아파트가 눈에 띈다. 저자는 “여차하면 성큼성큼 걸어와 선사 유적을 파괴할 것만 같은 위압감을 안겨 준다”고 토로한다. 동삼해수천 인근의 자연마을이 있던 곳에도 거대한 아파트 군집이 들어섰고 오 년 전 들락거렸던 골목길은 자연히 사라져 버렸다고 안타까워한다.

개발의 광풍은 사람들의 기억에 대한 향수조차 앗아가 버렸다. 저자가 우암동 소막마을을 나와 장고개를 향해 올라가려니 거대한 가림막이 앞길을 막았다. 길이 사라져 개구멍을 통해 겨우 큰길로 나오니 지난 1월 25일부터 고개까지 가는 장고개로가 재정비구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안내판을 만났다. 우암동에서 고갯마루까지 나 있던 장고개로가 아파트 안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영화 ‘친구’에서 유오성이 밝힌 본적이 장고개다. 그만큼 장고개는 우암동은 물론 부산 사람들을 향수에 젖게 하는 지역이다. 장고개는 우암동 쪽에서 문현동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이다. ‘장을 보러 갈 때 넘는 고개’라는 뜻으로 장고개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저자는 산복도로 수정아파트의 ‘갤러리수정’에서 영도를 내다보다가 깜짝 놀란다. 우후죽순처럼 올라온 고층 아파트들로 인해 봉래산 방송 송신탑만 조금 보여서 영도가 물밑으로 없어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층 아파트 건설은 조망권 새치기나 다름없다”며 “바다 풍경은 부산 시민 누구나 산 중턱을 찾으면 즐길 수 있는 공유 재산이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러면서 호주 시드니에 더들리 페이지라는 평지를 예로 든다. 시드니항의 아름다운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소이다. 그 땅은 원래 더들리 페이지라는 인물의 개인 부지였다. 이 사람은 그곳의 멋진 전망을 혼자 보기 미안했는지 쪽에 어떤 건물도 짓지 않는 조건으로 이 부지를 시드니시에 기부했다고 한다. 자연은 모두의 것이라는 인식이 우리에게도 절실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말로 포장된 무자비한 개발이 앗아간 것들에 위령제라도 지내자는 심정으로 걷고 썼다. 사람과 물자가 흐르는 자연스러운 생김새인 길을 찾는 여정이자 삶터의 속살을 보고자 하는 행보였다”고 했다. 이준영 지음/호밀밭/240쪽/1만 6800원.


<부산 백 년 길, 오 년의 삭제> 표지 <부산 백 년 길, 오 년의 삭제> 표지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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