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6000명 학살 간토대지진 100돌, 혐오·국가폭력에 맞서 온 기록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백년 동안의 증언/김응교

<백년 동안의 증언>. 책읽는고양이 제공 <백년 동안의 증언>. 책읽는고양이 제공

100년을 맞았다. 2023년 9월 1일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다. <백년 동안의 증언>은 1923년 이후 일본의 혐오사회와 국가폭력에 지난하게 맞서 온 한·일 작가와 일반 시민들의 기록이다. ‘간토대진재’, 지진에 학살의 대재앙이 덧붙여 칭한 이름이다. 그해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따르면 학살된 조선인은 무려 6661명에 달했다. 참혹한 대살육이었다.

무서운 대살육은 “폭도가 있어 방화 약탈을 범하고 있으니 시민들은 당국에 협조해 이것을 진압하도록 힘쓰라”는 일본 정부에 의해 부추겨졌다. 계엄령이 떨어지고, 군대 경찰 헌병이 총출동했고 민간인 자경단이 일본도, 죽창, 불갈구리를 들고 ‘조선인은 전부 죽어버려!’라며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그때 그녀는 임신해 있었기 때문에/잡아 찢긴 배 속에서/아직 눈도 코도 없는 태아가 튕겨나왔습니다/그 토마토처럼 연약한 태아를/-이것도 조선의 종자다! 라며/군화 발 뒤꿈치로 심하게 밟아 뭉개버렸습니다’. 김용재가 1927년에 사실에 근거해 쓴 시의 일부다.

일본 프롤레타리아 시인 쓰보이 시게지(1898~1975)는 1929년 장시 ‘15엔 50전’을 썼다. 이 책에 국내 초역돼 실렸다. 시 제목은 ‘쥬우고엔 고쥬센’으로 발음되는데 그 발음이 조선인을 골라내는 죽음의 척도였다. 조선인들은 ‘츄우코엔 코츄센’으로 발음했는데 그러면 당장 학살됐다. 당시 대진재 때 조선인과 더불어 사회주의자 중국인 대만인도 표적이 됐다.

5장 구성 중 3장은 이기영, 김동환, 구로사와 아키라,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드라마 ‘파친코’ 등 여러 작품을 통해 간토대진재에 대한 증언을 담았다. 간토대진재 때 자행된 조선인 학살 사건에 충격을 받고 일본에서 돌아온 이들이 숱했다. 김동환 김소월 김영랑 박용철 이기경 이상화 채만식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고 귀국했다. 양주동 이장희 유엽은 조선에 와 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썼다. 이중 김동환 이기경 이상화 유치진 등은 간토대진재를 직접 썼다. “조선인을 쳐 죽여라!”며 죽창 불갈구리로 찌르고 막대기로 난타하고 일본도로 베고 손도끼로 등짝을 찍고, 이도 저도 없으면 발로 차서 죽이는 잔인한 살육을 목도한 뒤 역설적으로 한국문단은 문예 전성기를 맞이한 것이었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천착했고, 마르크시즘을 수용하는 계급주의 문학으로 나아갔다.

조선인만 아파했던 게 아니다. 양심적 일본인들도 아파했다. 일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는 당시 13세였다. 그는 학살을 목격했다.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에게 진정한 어둠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라고 그는 썼다. 조선 아나키즘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 아나키스트 오스키 사카에는 당시 아내, 조카와 함께 일본 헌병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많은 양심적 일본인들이 간토대진재의 비극을 기억하고 기록했다.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는 ‘왜 인간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배운단 말인가’라고 절규했다. 후세 다쓰지는 “일본인으로서 전 조선 형제에게 사죄합니다”라고 조선 일간지에 사죄문을 보냈다. 그는 당시 자유법조단을 구성해 간토대진재 때 학살당한 조선인이 6000명이라고 쓴 보고서를 출판했다. 1926년 간토대진재 때 체포당한 박열과 그 애인 가네코 후미코를 변호하기도 했다.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은 큰 범죄를 한국에 범했다. 게다가 아직 충분한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일본은 상대국이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에도 양심적 지식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동아시아 평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일본 정부는 변할 수 있을까?” 그것에 함께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김응교 지음/책읽는고양이/280쪽/1만 7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