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인생과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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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김수돈 작사·금수현 작곡 ‘서선수의 노래’. 남영희 제공 김수돈 작사·금수현 작곡 ‘서선수의 노래’. 남영희 제공

영화 ‘마이 웨이’(2011)는 식민지 조선의 마라토너 김준식의 이야기다. 제2의 손기정을 꿈꾸었으나 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는 데 실패한다. 일본인 타츠오가 대신했다. 부당한 선발 과정에 반발하다 강제로 징집되어 제2차세계대전의 격랑에 휩싸이고 만다. 그들은 운명처럼 전장에서 재회한다. 일본군 대위 타츠오는 내몽골 노몬한전투에서 참패하여 포로가 된다. 그들은 중국, 소련, 독일을 거쳐 마침내 노르망디에 이른다. 여러 나라 군복을 갈아입으며 생사를 넘나들던, 머나먼 그 길에서 마침내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빨리 집에 가야지.” 간절하게 달리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 시상식에서 일장기를 화분으로 가리고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않겠다 결심했다. 1947년에는 보스톤국제마라톤대회 감독으로 나섰다. 베를린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남승룡은 서윤복의 페이스메이커로 출전했다. “우리 이름으로 못 뛰었으니까.” 손기정과 남승룡이 함께한 까닭은 일장기가 아니라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서였다. 이 경기에서 서윤복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상심의 언덕’이라 불리는 긴 오르막을 혼신의 힘을 다해 넘을 수 있었던 힘은 해방된 조국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강인한 의지였다. 마라톤은 민족적 심상을 투영하는 스포츠였다.

165cm 단신으로 세계를 제패한 서윤복의 도전을 그린 영화 ‘1947 보스톤’이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 ‘서선수의 노래’(1947)는 김수돈이 노랫말을 짓고 금수현이 곡을 붙였다. 동일한 리듬을 반복해 쉽고 단순하게 구성하여 함께 부르기 좋다. 부산운동장에서 열린 환영 행사에서 합창으로 연주하여 서윤복 선수의 승리를 한껏 기렸다. “보스톤 하늘 더 높이 태극기 휘날리고/굴욕의 굴레 벗고서 민족의 영광 얻었다/장하다 서윤복 선수 그 모습 우러러보라/육주에 흐르는 환호 세우라 조선의 아들”. 그날, 보스톤 하늘의 태극기는 세계만방에 해방 조선을 알리는 외침이자 식민 지배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려는 신생의 노래가 아니었을까.

흔히 인생을 마라톤에 빗대곤 한다. 마라톤은 끈기와 인내, 역경의 극복을 상징한다. 타자를 이기기 위한 경기가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다. 대회마다 코스나 날씨가 다른 까닭에 신기록이란 있을 수 없다. 완주 자체가 곧 목표이자 의미다. 페이스메이커가 있는가 하면, 숫제 진로를 방해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함께 달려야 하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어떤 가치를 위해 달리는가가 중요하다. 삶도 마찬가지다. 8월의 끝자락,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랐는데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손기정과 남승룡, 역사의 격랑 속에서 머나먼 이국까지 흘러가야 했던 김준식과 타츠오가 끝내 달려야 했던 뜻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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