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한 잎의 여자/오규원(1941~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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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 중에서


추억의 갈피에 맺혀있는 연인의 모습은 아련하다. 그래서 늘 ‘쬐그만’ 모습이거나, 가냘픈 모습으로 등장해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애틋함을 남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 충족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결핍과 회한으로 채워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말로 영원한 그리움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모습은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은 여림으로, 나아가 ‘한 잎의 솜털’, ‘한 잎의 눈’ 등의 감각으로 도드라진다. 심혼에 응결된 사랑의 모습은 그 사람과 나눴던 감각적 형상 그 자체에 있다. 그리움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감각만 떠오르면 그 시간과 장소를 ‘영원히 나 혼자 가질’ 수밖에 없게 한다. 그때 사랑은 쓸쓸함과 기쁨의 현(絃)을 다 울려주는 역설이 된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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