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여름이 지나가고
최혜규 해양수산부장
무더위 속 극한호우·흉기 난동 등 뉴스 쏟아져
생명과 안전 문제·막을 수 있었던 사고에 충격
사회적 신뢰 회복 위한 노력이 제대로 된 추모
여름이 갈수록 힘든 건 지구 전체의 문제다. 게릴라성 호우와 밤에도 식지 않는 폭염은 지구온난화가 아니라 지구열대화가 시작됐다는 유엔의 경고를 당장의 위기로 체감하게 했다. 특히 한국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든 건 자고 일어나면 쏟아지는 사건 사고들이었다.
2주 넘게 계속된 극한호우로 전국에서 사상자가 나오는 와중에 수도권에서 시작된 무차별 칼부림은 전국 곳곳의 동시다발 칼부림 예고로 번졌다. 전 세계 청소년들이 뻘밭에서 고생한 새만금 잼버리 사태에 이르러서는 새 뉴스를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끝이 아니었다. 대낮 서울 한복판 둘레길에서 출근하던 여성이 성폭행범에게 살해당했다. 어느 초년 교사는 근무하던 초등학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여름의 말미에 일본은 예고했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시작했다. 모두 7, 8월 두 달새 일어난 일들이다.
뉴스가 뉴스를 덮었고, 이슈가 이슈를 삼켰다. 사람들은 ‘뉴스 급체’를 호소했다. 짧은 기간 큰 뉴스가 집중적으로 발생하기도 했지만, 이들 뉴스와 뉴스 소비자의 거리가 가까웠다는 의미다. 아우성을 듣고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생생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무엇보다 생명과 안전의 문제였다. 천재지변과 이상동기 범죄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뉴스 속 피해자가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감각은 실재하는 두려움이다. 충북 오송 지하차도 참사를 포함해 전국에서 47명이 숨지고 3명이 실종된 집중호우가 그랬고, 십수 명의 사상자를 낸 신림역, 서현역 흉기 난동사고와 관악산 둘레길 성폭행 사망사고도 그랬다.
대비할 수 있었고 적어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기후변화로 집중호우는 점점 극단적인 양상이 됐고, 3명이 숨진 부산 초량 지하차도 침수사고 이후로도 3년이 지났다. 개인적인 좌절과 분노를 여성을 비롯한 약자에게 투사하는 ‘인셀(비자발적 독신)’들의 혐오가 온라인에서 싹을 틔운 지는 오래됐지만 제때 도려내지 못한 결과 도심의 흉기 난동과 성범죄로 나타났다.
범주는 달라도 사건이 국민적 이슈가 되는 이유는 비슷하다. 일본의 원전 오염수 방류가 장기적으로 건강에 미칠 영향은 어느 쪽으로든 모두에게 공평할 것이다.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 이후 교사들은 그동안 숱하게 호소한 교육 현장의 감정노동 실태를 새삼 고발했다. 새만금 잼버리 사태는 국제대회가 이렇게까지 엉망일 수 있다는 놀라움과 한국을 찾은 청소년들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안타까움이 컸다.
가장 심각한 건 사회적 신뢰의 근간을 건드린 것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건 기본적인 믿음이다. 길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은 나를 해코지하지 않고,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면 공권력이 나서서 제지할 것이다. 재해 위험 상황에서는 정부가 안전 지침을 안내하고, 막을 수 있는 인재였다면 권한 있는 사람이 책임질 것이다. 이런 믿음이 깨질 때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개인의 도덕도, 합의된 권위도 소용없게 된다. 그곳은 지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의 뉴스들에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면 거기에서 지옥의 일단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극한호우와 흉기 난동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오송지하차도 참사 유가족협의회는 지난 4일에도 분향소 기습 철거에 항의하며 농성을 벌였다. 다시 분향소를 열었지만,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요구가 이뤄지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흉기 난동의 트라우마로 서울 지하철 출근길에서는 지금도 오인 신고와 대피 소동이 끊이지 않는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만 불어도 불같은 여름은 가물가물하게 마련이다. 앞으로는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9월에도 폭염주의보에 열대야가 이어진다. 전남 여수 바다는 아직도 식지 않아 양식장 우럭이 떼로 죽어나간다. 여름이 끝나도 끝이 아니다. 가을에는 무섭게 뛴 추석 제사상의 물가로, 겨울에는 북극의 해빙이 녹아서 몰고온 한파로 돌아올 것이다. 다음 여름이 오기 전에 지구 전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올여름을 휩쓸고 간 사건 사고들도 마찬가지다. 뉴스는 더 새로운 뉴스로 묻히게 마련이지만 다음 사건 사고가 되풀이되기 전에 정부는 국민이 안심하고 다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서현역 사고로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숨진 미대생 김혜빈(20) 씨를 포함해 지난여름의 희생자들을 제대로 추모하는 일이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