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 경성에도 ‘핫플 맛집’ 있었다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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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맛집 산책/박현수

조선 최초 서양요리점 ‘청목당’
조선호텔 식당, 낙랑파라 등
근현대소설에 등장한 맛집 10곳
화려함 뒤 식민의 그늘·상흔도 주목

식민지 시대 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본정 1정목 거리 풍경. 길 끝에 작게 보이는 건물이 청목당이다. 한겨레출판 제공 식민지 시대 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본정 1정목 거리 풍경. 길 끝에 작게 보이는 건물이 청목당이다. 한겨레출판 제공

<대경성도시대관>에 수록된 조선호텔의 전경 사진. 조선호텔 식당은 식민지 시대 경성에서 가장 호화로운 식당이었다. <대경성도시대관>에 수록된 조선호텔의 전경 사진. 조선호텔 식당은 식민지 시대 경성에서 가장 호화로운 식당이었다.

식민지 시대 경성에도 줄 서는 식당이 많았다. 대표적인 곳이 조선 최초의 서양요리점 ‘청목당’이었다. 1907년 개점한 청목당의 주소는 남대문통 3정목 10번지였지만, 실제로는 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본정 입구에 위치했다. 청목당 1층에는 수입 식자재를 판매했고, 2층에서는 향긋한 커피와 고급 과자를 맛볼 수 있었다. 3층에는 식당 겸 카페 ‘라이온’이 자리잡고 있어 코스 요리가 제공됐다. 당시 코스 요리의 가격은 대략 1원 50전에서 2원 50전 정도였는데 지금 물가로 따지면 7만 원에서 12만 원 정도 되는 가격이었다. 청목당은 1910~1920년대 경성의 핫플레이스였다. 그 주위에는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조선식산은행 등의 기관과 미쓰코시, 조지아, 미나카이와 같은 백화점이 있었다. 비록 조선호텔 식당이 문을 연 이후에는 최고의 자리를 내줬지만, 청목당은 여전히 고급 서양요리점으로 대접받았다. 새로운 풍조를 좇았던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약혼식이나 피로연을 열기도 했다. 당시 이국적인 공간에서 이상야릇한 음식을 처음 맛본 사람들의 표정이 어떠했을지 궁금해진다. 염상섭의 장편소설 <삼대>는 조선 최초의 서양요리점 ‘청목당’의 분위기를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경애, 매당, 의경 등 세 여자의 긴장감 넘치는 술 대작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이들은 오렌지로 만든 술 ‘퀴라소’를 마신다. 소설에는 ‘매당이 브랜디, 위스키는 많이 마셔봤지만 기린 목 같이 긴 목의 퀴라소 병은 처음 본다’고 나온다.

<경성 맛집 산책>은 근대의 흔적인 ‘경성의 맛집’과 1920~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외식 풍경을 풍부한 자료를 통해 복원해 낸 책이다. ‘음식문학연구가’인 저자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삼대> 등 한국 근현대 소설에 등장한 경성의 유명한 맛집 10곳을 소개한다. 각 음식점의 메뉴와 가격, 주요 고객층, 개성 있는 내·외관, 독특한 시스템 등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특히 당시의 풍경을 재현한 지도 일러스트와 다수의 사진과 기사 자료, 소설 삽화 등을 곁들여 읽는 재미를 더한다.

조선호텔 식당은 식민지 시대 경성에서 가장 호화로운 식당이었다. 이 식당은 정통 프랑스식 코스 요리로 유명했다.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심훈의 소설 <불사조>는 조선호텔 식당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에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계훈이 나오는데 그의 옆에는 독일 유학 때 만나 결혼한 주리아라는 여성이 있다. 그는 주리아와 한 달간 조선호텔에서 머무는데 그 비용은 900원으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4500만 원 정도다. 이곳을 방문했던 주된 고객층은 아주 부유한 소수의 조선인이거나 한국에 주재했던 외국인이었다. 김말봉의 1930년대 소설 <밀림>에는 조선호텔 식당에서 열린 결혼 피로연 풍경이 나온다. 중앙에는 대형 홀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조선식, 서양식 방들도 여럿 마련되어 있었다. 홀은 높은 천장에 크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으며, 그 아래 다수의 식탁이 구비되어 있었다.


남국의 정취가 느껴지는 낙랑파라의 내부. 이 곳은 이상, 박태원의 단골 카페이자 예술가의 소일터였다. 한겨레출판 제공 남국의 정취가 느껴지는 낙랑파라의 내부. 이 곳은 이상, 박태원의 단골 카페이자 예술가의 소일터였다. 한겨레출판 제공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는 이상, 박태원의 단골 카페이자 예술가의 소일터로 알려졌던 다방 ‘낙랑파라’가 등장한다. 구보 씨의 묘사를 통해 낙랑파라에 흐르던 독특한 분위기와 커피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낙랑파라를 찾은 손님들은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레코드를 듣는다. 손님의 대부분은 직장을 가지지 않았고, 우울함과 고달픔을 지닌 젊은이들이었다. 이 소설에 실린 이상의 삽화를 통해 낙랑파라의 구체적인 메뉴를 접할 수 있다. ‘브라질 커피’ ‘립톤 홍차’ ‘아이스크림’ ‘코코아’가 보인다.

하지만 책에 나온 화려한 맛집들과 군침 도는 음식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조선인은 극히 일부였다. 저자는 와인빛으로 장식된, 산해진미가 차려진 식탁 뒤 감춰진 고달픈 식민의 그늘과 상흔도 주목한다. 모던걸, 모던보이의 핫플레이스였던 과일 디저트 카페 ‘가네보 프루츠팔러’는 내부를 칸막이 좌석 ‘로맨스박스’로 꾸며 연인들의 발걸음을 끌었고, 외부는 젊은이들이 동경하던 남국의 해변처럼 꾸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 달콤한 향기의 이면은 어두웠다. 가네보 프루츠팔러는 ‘가네보 방적회사’에서 개장한 카페로, 유수의 기업에서 운영하는 음식점의 선두였다. 가네보에서 운영한 방적공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여직공들은 열악한 근무 조건과 저임금에 시달렸다. 1937년 일본이 전시체제에 들어서면서 공장은 군수 공장으로 탈바꿈해 군수 물품을 만들었다. 또 ‘조선호텔 식당’은 화려한 내부와 고급스러운 코스 요리로 유명했지만, 한 끼 저녁값이 곤궁한 서민들의 한 달 식비에 육박했다. 예술가들의 살롱으로 여겨졌던 ‘낙랑파라’ 이름의 유래에는 ‘대동아공영’이라는 전쟁의 명분과 일본의 정복욕이 녹아들어 있었다. 박현수 지음/한겨레출판/468쪽/2만 2000원.


<경성 맛집 산책> 표지. 한겨레출판 제공 <경성 맛집 산책> 표지. 한겨레출판 제공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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