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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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 소설가

직장 동료가 한탄했다. 이젠 아이들이 TV 드라마조차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가 TV 안 보면 좋은 현상 아니냐? 라고 반문했더니 동료는 나보고 구석기 시대 사람이냐며 핀잔을 준다. 요즘엔 가족이 함께 거실에 있어도 각자 휴대전화 보는 풍경이 새롭지도 않다고 했다.

지금의 아이들은 주로 몇 분, 혹은 몇 초 분량으로 만들어진 소위 ‘숏폼’이라 부르는 동영상을 본다고 한다. 실시간에 수백 개씩 생성되어 전송되는 SNS의 동영상, 유튜브 동영상. 이를테면 좋아하는 연예인이 등장한 쇼 프로, 혹은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처럼 사람들이 재미있어할 부분만 편집한 것이라고 했다.

동료는 정해진 방송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드라마나 긴 시간 집중해야 하는 영화 따위는 보지 않는 아이들을 걱정했다. 내용이 괜찮다는 소문이 나면 줄거리만 소개하는 동영상을 보거나, 또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만 편집한 것을 본다고 했다.

그 참 큰일이네, 하는 얼굴로 고개 끄덕이던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사실, 내가 그러고 있었으니 말이다. 퇴근하면 식사 마치고, 잠시 뉴스를 보다가 슬며시 짧은 동영상을 선택하곤 했었다. 요즘엔 TV와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으니 편하게 앉아 언제든 유튜브를 볼 수 있다. 그러잖아도 피곤한데, 심각한 것보다는 마음 편히 웃는 시간이 좋다는 이유로, 혹은 빠른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런 동영상을 봤다.

시대가 변했고, 늙으나 젊으나 사는 게 힘들어 그런 걸 어쩌랴 싶긴 했다. 그러다, 문뜩 정말로 심각한 변화가 다가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떠올렸다. 시작과 끝의 구분이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

따지고 보면 우리 문명의 발달은 시작과 끝을 알려는 모든 노력의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 인간의 시작과 종말은 최대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인류의 시작과 끝을 규명하기 위해 수많은 학문이 생겨나고 발전하였다. 수학, 생물학, 언어학, 역사학, 사회학 등등 대부분의 학문이 그렇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이 세상 전부의 기원에까지 눈을 돌렸다. 우주의 시작을 알려 하고, 우주의 끝을 상상하고, 심지어는 빅뱅 이전엔 무엇이 있었는지에 대해 고심한다. 우리는 시작과 끝을 알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해왔었다.

사실, 시작과 끝을 명백하게 나눌 수 있는 건 세상에 많지 않다. 때로는 모호하고 때로는 너무 길다. 그래서 우리는 시작과 끝을 각자의 기준으로 판정해야 하는 법을 익히고 깨달아야 했다. 시작을 인식할 수 있어야 끝을 가늠할 수 있으며, 끝을 판단할 수 있어야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의 반복이 바로 이 세상의 원동력이자 미래였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처럼 시작만 반복될 수 있다. 또한,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만을 중시할 때도 있다. 그나마 둘 중의 하나는 가졌기에 세상은 나름의 무게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어 언제나 진행 중인 상태라면 어떨까? 새로운 생산과 창조는 사라지고, 끊임없는 소모와 퇴행만 반복될 것이다.

짧게 편집한 동영상은 껍질과 씨앗을 빼고 먹는 과일처럼 달콤하고 재미있다. 이렇게 재미있는 걸 외면하기는 어렵다. 매몰차게 끊는 것도 유난스럽지 않은가. 대신에 조금 줄여서 볼 작정이다. 얼마나 줄일지는 차마 밝히지 못하겠다. 이러나저러나 보긴 할 텐데, 조금 불안하기는 하다. 시작과 끝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만 남아있는 세상이 온다면? 시작을 알 필요 없고, 결말도 궁금하지 않은 시대가 닥쳐올까 싶어 쓸데없이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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