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절망보다 희망
후손 아닌 ‘나의 문제’ 된 기후 위기
인류 생존 위협하는 증거 수두룩
전대미문 재앙 경고 메시지만 가득
정확한 상황 판단, 행동은 제자리
무력감 주는 일회성 구호보다
미래 희망 담아 모두가 나설 때
다가가니 줄지어 벽에 매달린 작은 나뭇가지들이 떤다. 사시나무 떨듯 부르르 온몸을 흔든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인간을 향한 처절한 경고다. 지금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 1층 전시실에서 만나는 강렬한 한 장면이다.
팀 프로젝트 ‘죽은 나무에 접속하기’에 참여한 유화수 작가는 자택 앞 12그루의 나무가 사라진 사건을 이처럼 표현했다. 1996년 빌라 단지가 들어설 때 심긴 작은 나무들은 2023년 거대하게 자랐다. 이들은 올 5월 조망을 가린다고 싹둑 잘려 나갔다. 인간의 움직임을 센서로 인지한 나뭇가지들이 그토록 전율했던 이유다.
이 작은 사건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환경 파괴가 부른 기후 위기는 당장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 먼 후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 내 아이들의 문제다.
기상청에 따르면, 1991년부터 2020년까지 30년간 부산의 8월 열대야 일수는 평균 11.2일이었다. 그런데 올 8월에는 20일로, 배 가까이 늘었다. 하루 최고 기온이 33도 이상인 폭염 일수도 심각하다. 올 8월에 8일을 기록했는데, 지난 30년 평균은 3일에 그쳤다. 벌써 내년 여름이 두렵다.
우리에게 더 큰 위기감을 주는 것은 ‘극한 호우’와 태풍이다. 해가 갈수록 더 많은 사상자와 재산 피해를 낸다.
기상 관측을 시작한 1904년 이후 부산에서 해마다 1시간 안에 가장 많은 비가 내린 날을 보면, 시간당 106mm가 내린 2008년 8월 13일이 1위다. 이어 2011년 7월 27일 96mm, 2009년 7월 16일 90mm의 순이다. 얼마나 더 심각해 질지 짐작하기 힘든 극한 호우는 서울 강남, 반지하 주택과 주차장, 대기업 공장, 어느 도시의 지하차도까지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해수면 상승도 ‘고작 몇 cm’라 무시할 일이 아니다. 그 몇 cm가 지금껏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기후 재앙을 불러 왔고, 앞으로도 상상하기 싫은 재난 상황을 초래할 것이다.
과거 기후위기는 논쟁적 화두였다. 지금도 미국을 중심으로 음모론까지 등장하며 정치적인 갈등이 벌어진다. 10여 년 전만 해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가 기후 위기 보고서를 작성할 때 세계 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하지만 최근 기후·환경 전문가들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극한 기후가 인류의 가장 큰 위협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고 한다. 가타부타 논쟁도 사그라들었다. 지구의 기온 상승이 가속화하면 인류에게 희망이 점차 사라진다는 것이 명확한 과학적 사실로 입증되어서다.
이제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절망적인 상황을 한탄하며 경고 사이렌만 울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절망은 무력감을 부를 뿐이다. 그 주체가 개인이냐, 기업이냐, 정부냐를 가릴 처지는 더욱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행동하는 이들을 주목하고, 어떤 식으로든 참여해야 한다.
방송인 타일러 라쉬는 기후 위기 대응에 진심이다. 책으로, 강연으로 기후 위기의 심각함과 행동 요령을 전파하는 그는 요즘 ‘5분만 있으면 누구든 함께할 수 있는 기후위기 대응 캠페인(Five Minutes for the Future)’을 시작했다. 홈페이지 SNS 등을 통해 시민, 전문가, 기업, 조직 등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는 “선진국들은 이미 기후위기가 초래할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내다보고 다각도로 대비하며 움직이고 있는데, 한국은 아직 그런 적극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게 안타깝다”고 말한다.
부산에서도 희망을 향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이달 초 (사)자연의권리찾기가 주최한 ‘제2회 하나뿐인 지구영상제’가 영화의전당에서 5일간 성대하게 열렸다. 지난해에 이어 1만 5644명의 관객이 국내외 작품으로 기후위기를 공감했고, 국내 전문가들도 ‘ESG국제컨퍼런스’로 함께 힘을 보탰다.
특히 지구영상제 개막작 ‘레거시’는 큰 울림을 줬다. 하늘에서 본 지구의 현실은 충격적이었다. 기후위기 활동가인 프랑스 얀 아르튀스-베르트랑 감독은 5년 전 탄소 배출의 주범인 비행기를 타지 않기로 결심해 부산으로 오지 못했다. 세계인에게 전하는 그의 메시지는 이랬다.
“과학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세요. 기후 위기를 알아야 합니다. 생태를 중요시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합시다. 우리의 탄소발자국을 계산해 봅시다. 산업적으로 생산된 육식을 하지 않고, 지역 유기농 제철 음식을 먹도록 노력합시다. 지속가능한 금융을 실천하는 은행을 이용하고 기차, 버스, 자전거, 공유자동차로 여행합시다. 비행기는 예외적으로만 이용합시다. 이것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길입니다.”
탄소 배출에 무신경한 기업에 항의하고, 정부·지자체에 기후 위기 정책을 요구하는 행동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다.
박세익 기획취재부장 run@busan.com
박세익 기자 ru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