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느리게 살아남는 법
류현진, 팔꿈치 수술 복귀 후 호투
느린 공에도 송곳날 제구력 돋보여
170km 광속구도 제구 안 되면 허사
구속 처지는 국내 투수들 훈련 필요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란 격언이 있다. 앞을 향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앞서 방향(목표) 설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무작정 빠르게 달려 나가는 것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일 터. 방향을 잃으면 방황하기 십상이니까.
요즘 이 말의 의미를 스포츠를 통해서 되새기게 된다. 특히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 활약하는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의 피칭을 보면서. 류현진은 팔꿈치 부상을 당해 ‘팔꿈치 인대 접합수술’을 받고 재활을 거쳐 1년여 만에 빅리그에 복귀했다. 그의 복귀전에 앞서 전문가들의 의구심은 컸다. 36세란 적지 않은 나이에 네 번째 큰 수술(고교시절부터)을 받고 과연 예전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적어도 복귀 초반엔 고전하리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류현진은 보기 좋게 예상을 깼다. 복귀 후 선발 등판한 7경기(12일 현재)에서 3승 2패 평균자책점 2.65, 34이닝 동안 삼진 28개를 뺏는 빼어난 성적을 기록 중이다.
직구 구속은 수술 전보다 떨어졌다. MLB 기록 통계사이트인 베이스볼서번트에 따르면 류현진의 올 시즌 직구 평균 구속은 시속 88.3마일(약 142km)에 불과하다. 이는 100구 이상 던진 MLB 투수 618명 중 607위에 해당하는 최하위 수준의 느린 공이다. 올 시즌 MLB 투수 평균 구속은 94.2마일(151.7km)에 이른다. 그럼에도 류현진이 살아남는 건 다양한 구질과 송곳날 같은 제구력 덕분이다.
류현진은 시속 100km까지 떨어지는 매우 느린 커브를 들고 나와 MLB 강타자들을 무력화하고 있다. 140km대 직구와 120km대 체인지업, 100km대 커브를 섞어 던지는 완급조절에 타자들은 타이밍을 빼앗기기 일쑤다. 여기에다 스트라이크존 상하좌우 구석구석을 자유자재로 찌르는 제구력이 더해지며 느린 공의 위력은 배가 된다.
스티브 댈코스키란 투수가 있었다. 미국 팬들에겐 역사상 가장 빠른 공을 던진 투수로 기억되는 선수다. 댈코스키가 프로에서 뛴 시기는 1957년부터 1965년까지다. 키 179cm에 77kg으로 평범한 체격의 이 왼손잡이 투수가 기록한 최고 구속은 177km. 스피드건이 없던 시절이라 정확한 속도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그의 공을 접했던 타자나 야구인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하지만 댈코스키는 메이저리그 무대를 한 번도 밟지 못했다. 그는 마이너리그에서만 9년을 뛰며 통산 46승 80패 평균자책점 5.59를 남겼다. ‘하얀 번개(White Lightning)’란 별명답게 불같은 광속구를 앞세워 총 995이닝을 던지는 동안 무려 1396개의 삼진을 뽑아냈다. 그러나 볼넷 또한 1354개나 허용했다. 고질적인 제구력 불안으로, 삼진을 잡아낸 만큼 볼넷을 내준 것이다.
어마무시한 공을 던졌지만, 형편 없는 제구력은 댈코스키의 발목을 잡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투구는 타자의 귓불을 찢고, 심판의 마스크를 조각냈으며, 포수 머리 위의 관중석 의자를 강타하기도 했다. 제구력 잡기에 실패한 댈코스키는 끝내 빅리그에 오르지 못하고 어깨 부상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결국 투수의 생명은 제구력이다. 제 아무리 160km가 넘는 광속구라도 ‘방향’을 잡지 못하면 무용지물일 뿐이다. 빠른 공이 없어도 다양한 변화구를 꽂아 넣는 정교한 제구력으로 무장했다면 최고의 투수로 생존할 수 있다. 류현진 이전에 그레그 매덕스(355승), 톰 글래빈(305승), 제이미 모이어(269승)가 그랬다.
류현진의 부활은 국내 투수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도 드러났듯이 한국 투수들은 미국은 물론, 일본 투수보다도 직구 구속이 한참 뒤진다. 구속이 처지면 제구력이라도 뒷받침돼야 하는데 오히려 못 미치는 모습이다. 제구가 안 되니 자신감이 떨어지고, 타자와의 정면대결보다는 피해 가다 3볼까지 몰리고 볼넷을 남발한다.
강속구는 타고나지만, 제구력은 훈련과 노력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많은 훈련을 통해 투구폼의 문제점을 찾아 보완하고, 몸의 전체적인 균형감을 찾아 나가면 제구력을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제구력이 갖춰지면 시속 100km의 느린 공도 자신 있게 던질 수 있는 배짱이 생긴다.
투수를 ‘스로어(thrower)’가 아닌 ‘피처(pitcher)’라 부르는 건 방향성(목적성) 있는 공을 던지기 때문이다. 속도가 안 되면 방향이라도 잘 잡아야 하는데, 지금 한국 야구엔 방향성 잃은 공들이 너무 자주 보인다.
정광용 스포츠라이프부 에디터 kyjeong@busan.com
정광용 기자 kyje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