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홍범도 장군 논란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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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투쟁 승리 이끈 상징적 인물
CIS 고려인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한국·중앙亞 잇는 국제자산 가치
‘육사 흉상 철거’ ‘군함 개칭’ 논란
당사자에 모욕적 행태일 수 있어
시공간 배경 따져 평가 이뤄져야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으로 거의 4년 만에 카자흐스탄을 9일간 다녀왔다. 톈산산맥에 둘러싸인 분지로 도시매연 문제가 심각했던 알마티는 시내버스를 전부 천연가스 버스로 바꾸어 공기가 맑아져 있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남하한 러시아인 1만여 명이 도심의 호텔과 아파트를 차지하여 숙박난이 심하고, 소비물가도 15~30%가량 올라 있었다. 모처럼 찾아간 카자흐스탄을 여행 중일 때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한다는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홍범도 장군이 누구시던가. 일제강점기에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를 이끈 애국·애족의 상징이자 독립국가연합(CIS) 40만 고려인 디아스포라를 대표하는 정신적 지주가 아닌가. 그분은 21세기의 우리에 훨씬 앞서 세계를 개척하고 세계 인민과 협력해 나간 국제인이기도 하다. 중앙아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반이나 계속되고, 세계 블록화와 에너지 위기, 식량 위기 등이 가속되면서 경제적 국제정치적으로 중요성이 점차 증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홍범도는 중앙아시아와 한국을 잇는 국제 협력의 상징이다. 대한민국의 중요한 ‘국제자산’이다. 그는 우리의 영웅인 동시에 카자흐스탄의 영웅, 나아가 중앙아시아의 영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격의 그분은 크질오르다에서 조선극장 수위, 화부 등의 굴곡 많은 삶을 사시면서도 “내가 봉오동과 청산리의 그 홍범도다”라는 말씀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필자는 대학과 시민사회에서 지난 20여 년간 ‘러시아 극동과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강의하면서 누구보다 홍범도 장군을 흠모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크질오르다의 장군 묘소에 참배하러 갔다가 억새풀이 묘를 덮어버린 게 안타까워 현지 고려인협회에 벌초 기계를 사드리기도 하고, 교육부의 ‘인문 역량 강화사업’(CORE) 땐 학생들을 현지로 인솔하고 가서 그분의 우국충정 앞에 같이 엎드리기도 하였다. 가끔 카자흐스탄의 한국 기업에 취업해 나가는 졸업생이 있으면 꼭 묘소를 참배하고 술 한 잔이라도 올리기를 당부하였다.

애초부터 일이 잘못 꼬였다. 2021년 8월에 그분의 유해를 크질오르다에서 굳이 파서 서울로 옮긴 것부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그분이 지닌 복합적인 여러 상징성을 무시하고 좁은 국수주의에 함몰되어 일을 저지른 게 패착이었다. 그분은 알마티 1140km 북서쪽, 그 제2의 고향에 그대로 남아 고려인의 영웅으로, 한국인의 진취적 기상을 대표하는 분으로, 한민족과 중앙아시아 100여 민족의 친선과 우정의 상징으로 그대로 계속 계셨으면 훨씬 더 좋았다는 게 필자의 확신이다. 굳이 대통령 전용기를 보내는 쇼까지 하면서 그분의 고향인 평양도 아닌, 남쪽의 대전 현충원으로 모시고 올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흉상 철거와 군함 이름 개칭 논의는 더 고약하다. 이건 2차 가해다. 유해 이장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 역사와 인물에 대한 평가가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와 세계관에 따라 이렇게 요동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일부 극우파들은 홍 장군이 소련에 살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몸을 맡기고 공산당에 가입한 것만 가려내어 그분의 사상과 삶 전체를 깎아내리고 매도한다. 정말 어이가 없다. 아니, 그분에게 다른 선택권이 있었겠는가. 그 당시의 소련 사회주의는 약소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약속하는 ‘복음’이기도 했지만, 나라도 없는 유랑민들, 그것도 간첩 혐의가 덧씌워진 오갈 데 없는 백성을 소련 땅에서 이끌면서 지도자로서 다른 수가 있었겠는가. 그것도 무시무시한 스탈린 체제 밑에서 말이다.

친일파들과 같은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된다. 친일파들이야 본인들의 선택으로 일왕 만세를 외쳤겠지만, 홍범도에겐 레닌주의와 소련 공산당 외에 다른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방편과 목적은 구분해야 한다. 조국의 독립과 해방 그리고 동포 사회의 이익을 도모하여 지도자로서 공산당에 가입한 게 잘못이라면, 물고기가 물에 사는 것도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시대와 인물에 대한 평가는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수단과 목적을 구분해 가며, 큰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홍범도 장군의 동상을 육사에서 철거하고 예비 장교들에게 그분을 존경하지 말라는 건 청년들에게 “나라를 뺏겨도 너희들은 애국하지 말라” “지도자가 되더라도 너희들은 자기 백성을 버려라”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홍범도 장군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런 꼴을 보려고 내가 그렇게 만주를 떠돌고 소련 땅을 전전하며 투쟁했던가.” “이놈들아, 날 더는 욕보이지 말고 원래 있던 크질오르다로 도로 데려다 놔라!”

이재혁 유라시아교육원 이사장·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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