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범, 성폭행으로 처벌 불가? 가해자 보호하는 ‘강간법’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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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빙자 성범죄’ 강간죄 미적용
폭행·협박 입증 안 돼 영장 기각
처벌 수위 낮은 ‘위력 간음’ 그쳐
여성단체 “비동의 강간죄 도입해야”
‘동의 없는 성폭력 통합’ 필요 주문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와 여성시민사회 243개 단체는 지난 7월 25일 국회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협박·폭행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을 촉구했다.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제공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와 여성시민사회 243개 단체는 지난 7월 25일 국회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협박·폭행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을 촉구했다.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제공

아르바이트 면접을 빙자해 성범죄를 저지른 30대 남성(부산일보 9월 6일 자 1면 등 보도)에게 경찰이 애초 구직자 유인 목적인 성범죄였던 것으로 보고 ‘강간죄’ 적용을 추진했지만, 법적 한계에 부딪혔던 것으로 확인됐다. 현행 법이 사실상의 성폭행범을 성폭행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시민사회에선 ‘비동의 강간죄’ 도입 검토가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11일 부산 사하경찰서와 유족 등에 따르면 경찰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성매매 알선 등의 혐의로 구속 송치한 30대 남성 A 씨에 대해 수사 당시엔 강간죄 적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실제로 경찰은 강간죄를 적용해 구속영장까지 신청했지만, 강간죄의 구성요건인 ‘폭행과 협박’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보니 혐의 적용에 쟁점이 있었고 결국 법원은 영장을 기각했다.

경찰이 강간죄 등을 검토 추진한 이유는 A 씨가 애초부터 성폭력을 염두에 두고 아르바이트 면접을 진행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A 씨와 문제가 된 키스방 업주 사이에 별다른 금전 거래가 확인되지 않았고, 먼저 접근한 사람도 A 씨였다. 결국 A 씨는 금전적 이유보다 구직자를 좁은 방으로 유인하기 위해 아르바이트 면접을 나서서 한 것으로 보인다.

A 씨가 범행 뒤 피해자에게 돈을 건넨 것도 자신의 성범죄를 은폐하려 했던 고도의 계산된 행동일 수 있다는 게 경찰의 의심이다. 합의된 관계로 비치게 해 피해자가 신고를 꺼리게 하고, 수사가 시작돼도 합의가 있었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한 행동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실제로 A 씨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자신의 범행에 대해 “합의하에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다.

A 씨에게 ‘강간죄’ 적용이 안되는 것은 명백한 폭행과 협박을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성을 좁은 방으로 유인한 뒤 위축된 피해자에게 “실습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압박하고 성폭력적 행위를 한 것만으로는, 강간죄 적용에 필요한 협박과 물리력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A 씨는 처벌 수위가 현저히 낮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를 받아 구속됐다. 강간죄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이 적용되는 반면,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의 형량은 7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불과하다.

A 씨처럼 명확한 폭행과 협박이 없는 성범죄가 상당히 많지만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있다는 게 시민단체의 설명이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2022년 한 해 동안 상담한 강간 사건 4765건 중 폭행·협박이 없는 사례는 2979건으로 전체의 62.5%다. 피해 당시 상황은 회유 423건(21.5%), 강요 356건(18.1%), 지위 이용 236건(12%), 속임 223건(11.3%) 등 순으로 많았다. 금전을 미끼로 성폭행을 저지르는 등 가해자가 심리·경제적으로 취약한 피해자의 상황을 이용하는 사례도 두드러졌다.

전문가들은 피해자의 엄청난 저항이 없으면 동의했다고 해석될 여지가 크다는 점을 현행 강간죄 구성요건의 한계로 짚었다. 그러면서 아르바이트 면접 빙자 성범죄 사건에서도 피해자들이 성범죄가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김혜정 소장은 “‘피해자가 뛰쳐나가 소리를 질렀는가’ 같은 저항 위주로 생각하면, 현장에서 피해자의 자기 의사 여부 등을 제대로 살필 수 없다”며 “10~20대 여성에게 일자리, 알바 등이 언급된 사건에서 발생한 성폭력이 성매매를 넘나드는 경우가 있다. 정확한 정보도 주지 않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일에 연루되게 만드는 상황이 상당히 많다”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피해자가 스터디카페 일자리를 알아보러 가서 사람을 만났을 때 벌어질 일을 예상하는 어떤 범위가 있을 것이다. 다른 일을 제안하며 (업소로) 가보자는 게 내부 구경만 하자는 건지 등 피해자가 어디까지 알고 동의할 수 있었는지 제대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며 “비동의 강간죄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 등으로 처벌되고 있어 불필요하다는 시각도 있는데, 다른 범죄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동의가 없는 성폭력으로 통합하고 그 안에서 고용, 금전관계 등을 해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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