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과 도시의 기억 함께 품은 ‘피노 컬렉션’ 미술관 [부산 청년작가, 유럽에 가다]

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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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프랑스 파리
문화재 등록된 옛 상품거래소
안도 다다오 3년간 리노베이션
내부 구조 살리며 새 공간 창조

사람들 부르는 문화·예술의 힘
우리 것으로 소화하는 것 중요

옛 상업거래소를 리노베이션한 피노 컬렉션 유리 돔과 그 아래로 19세기 프레스코화가 보인다. 장학민 제공 옛 상업거래소를 리노베이션한 피노 컬렉션 유리 돔과 그 아래로 19세기 프레스코화가 보인다. 장학민 제공

부산의 청년작가 8명과 함께한 프랑스 파리 일정은 박물관에서 시작해 박물관으로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 센터, 피노 컬렉션 그리고 베르사유 궁전에 이르기까지 주로 박물관을 돌았다. 프랑스어로 박물관 혹은 미술관을 뜻하는 단어 뮈제(Musée)가 붙어 있는 이런 곳은 프랑스를 방문하는, 문화예술에 관심 있는 이라면 빠트리지 않고 찾게 되지만, 청년작가들에겐 더욱 남다른 경험이 됐다.

김가영 연극인은 “지금까지 다녀온 모든 곳의 정점이라고 말하듯 수많은 미술품을 보느라 넋이 나갈 정도”라고 표현했고, 서채하 작가(현대미술)는 “두 번째 방문이어서 기대감이 높지 않았는데 막상 파리에 들어서니 색다른 감정이 밀려들었고 익숙함 속 새로움이 새로움만 있을 때보다 더 좋았다”고 말했다. 손유하 작가(한국화)는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 등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미술관을 방문했으나 주어진 시간이 짧아 아쉬웠는데 기회가 생긴다면 여유를 두고 다시 방문하고 싶다”고 전했다.

이번 연재는 그중에서도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파리 중심부에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현대 예술 공간 ‘피노 컬렉션’을 소개한다.

피노 컬렉션 외관. 장학민 제공 피노 컬렉션 외관. 장학민 제공
피노 컬렉션 외관. 김은영 선임기자 피노 컬렉션 외관. 김은영 선임기자

피노 컬렉션, 2년 전 파리에 새 둥지

“파리 중심부에 있는 이 새로운 박물관과 함께, 현대미술에 대한 나의 열정을 공유하기 위해서입니다.” 프랑스의 억만장자 사업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프랑수아 피노(87)는 50년 이상 수집한 근현대 미술품 1만여 점으로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 미술관을 열면서 이같이 말했다.

피노가 누군지 잘 모르는 사람도 구찌, 보테가 베네타, 발렌시아가 등 명품 브랜드를 거느린 케링 그룹의 회장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다. 현대미술에서 슈퍼 컬렉터로 통하는 그는 이미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두 개의 미술관(팔라초 그라시 2006년 개장·푼타 델라 도가나 2009년 개장)을 세워 운영 중이다.

피노가 파리시로부터 부르스 드 코메르스(상업거래소)에 미술관 건립을 제안받은 건 2016년. 그 이듬해 1월 공사에 착공해 2021년 5월 미술관을 개관했다. 파리시와는 50년간 장소 임대를 계약했으며, 1개의 지하층과 4개의 지상층, 총 1만㎡ 이상의 공간을 미술관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파리 시장은 “현대미술이 취약한 파리에 새로운 심장이 될 것”이라며 반겼다고 한다. 파리는 퐁피두 센터나 파리현대미술관을 빼고는 현대미술을 떠올릴 만한 미술관이 상대적으로 약했는데, 피노 컬렉션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옛 상업거래소를 리노베이션한 피노 컬렉션 유리 돔과 그 아래로 19세기 프레스코화가 보인다. 장학민 제공 옛 상업거래소를 리노베이션한 피노 컬렉션 유리 돔과 그 아래로 19세기 프레스코화가 보인다. 장학민 제공

도시 기억과 역사 품은 현대미술관

부르스 드 코메르스는 피노 컬렉션만으로도 이목을 끌 만했지만,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타다오)가 리노베이션을 맡으면서 관심은 증폭됐다. 원래 부르스 드 코메르스는 곡물저장소로 지은 건물이었고, 19세기 들어 상품거래소로 탈바꿈했으며, 미술관 직전까지 상공회의소와 역사로 쓰였다.

3년에 걸쳐 이 건물을 리노베이션한 안도는 “상업거래소 건물의 벽에 고스란히 새겨진 도시의 기억을 간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존의 내부 구조를 살리면서 현대미술 전시에 알맞은 새로운 전시 공간을 창조했다. 건축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작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안도를 파트너로 선택한 피노가 들려준 ‘오래된 문화재 등록 건물을 (미술관으로) 선택한 이유’도 걸작이다. “나는 오늘날의 건축가들이 이 오래된 건물을 활용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삶이 계속되고 모든 것이 진화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건물 외관의 옛 모습과 내부 난간, 기둥 등은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건축미를 뽐내도록 최첨단 건축 기술이 사용됐다. 안도의 말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건물이기에 유산을 복원하는 동시에 건축을 창조하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던 것 같다.

피노 컬렉션 입구에 로툰다가 보인다. 김은영 선임기자 피노 컬렉션 입구에 로툰다가 보인다. 김은영 선임기자

작품 못지않게 미술관 자체가 예술

육중한 현관을 지나 미술관에 들어서면 작품도 작품이지만 공간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로마 판테온에서 영감을 얻어 세웠다는 원통형 콘크리트 공간(로툰다)이 눈앞에 펼쳐진다. 안도의 트레이드마크인 노출 콘크리트 기법이 여기도 적용된다. 로툰다 안엔 새로운 전시 공간이 탄생했다. 원 안의 원 개념이다.

천장으로 눈길이 저절로 갔다. 1986년 역사문화재로 등록된 상업거래소 상징 유리 돔 천장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돔 골격은 유지한 채 특별한 유리로 보강하고 피노 컬렉션의 작품을 돋보이게 디자인했다고 한다. 돔 아래엔 오대륙 간에 일어나는 무역을 묘사한 19세기 프레스코화가 천장에 가득하다. 이 프레스코화 역시 문화재이다. 현대적인 전시 공간과 전통적 회화의 조화가 이채롭다. 안도의 선택이었겠지만, 아름다움을 보존한 복원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로툰다 옆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오른다. 김은영 선임기자 로툰다 옆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오른다. 김은영 선임기자

모든 전시실은 원형 건물을 따라 연결됐다. 로툰다 외벽을 따라 설치된 계단을 따라 올라가도 2층과 3층의 전시실에 닿을 수 있다. 지하에는 오디토리움이 있다. 곳곳에 배치된 벤치 하나에도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벤치 등 건물 내부와 외부 가구는 부훌렉 형제가 맡아 디자인했다. 특히 부훌렉 형제가 가구의 연장선으로 조명 브랜드 ‘플로스’와 협업해 만들었다는 계단의 거대한 샹들리에 조명은 환상적이다.

피노 컬렉션 계단에 설치된 거대한 샹들리에 조명. 부훌렉 형제가 디자인했다. 수직으로 만들어진 17m에 달하는 조명은 나선형 계단의 화려한 형태와 더해지면서 거대하게 관람객을 압도한다. 김은영 선임기자 피노 컬렉션 계단에 설치된 거대한 샹들리에 조명. 부훌렉 형제가 디자인했다. 수직으로 만들어진 17m에 달하는 조명은 나선형 계단의 화려한 형태와 더해지면서 거대하게 관람객을 압도한다. 김은영 선임기자
아니카 리 설치 작품. 김은영 선임기자 아니카 리 설치 작품. 김은영 선임기자
사이 톰볼리 작품. 김은영 선임기자 사이 톰볼리 작품. 김은영 선임기자

피노 컬렉션 ‘폭풍이 몰아치기 전’

전시도 당연히 화젯거리다. 개관 이후 네 번째 기획 전시가 열리고 있다. 지난겨울 개막한 ‘아방로라주:폭풍이 몰아치기 전’ 전시는 오는 18일 가을이 되어서야 막을 내린다. 이번 전시 주제는 우리 시대가 당면한 과제인 기후 변화였다. 15명의 작가는 역사상 존재한 적 없는 상상의 계절에서 비롯된 불안정한 생태계를 창조해 낸다. 이를 감상하다 보면 철재, 유리, 석재,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상업거래소 건축물이 마치 온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로버트 고버의 ‘폭포’를 한 관람객이 촬영 중이다. 김은영 선임기자 로버트 고버의 ‘폭포’를 한 관람객이 촬영 중이다. 김은영 선임기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로버트 고버의 ‘폭포’라는 작품이다. 불가사의한 풍경이 나오는 수트 재킷 앞에서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는 관람객은 자연스럽게 등장인물이 된다. 로툰다 갤러리 전시작인 타시타 딘 영상을 비롯, 사이 톰블리, 히참 베라다, 아니카 리, 라이언 갠더, 듀안 핸슨 등의 작품이 눈에 띄었다.

전시장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를 향하다 보면 벽 아래 쪽에 구멍을 뚫고 나온 '말하는' 하얀 생쥐를 만나게 된다. 라이언 갠더 작품이다. 김은영 선임기자 전시장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를 향하다 보면 벽 아래 쪽에 구멍을 뚫고 나온 '말하는' 하얀 생쥐를 만나게 된다. 라이언 갠더 작품이다. 김은영 선임기자

미국 극사실주의 조각가 듀안 핸슨의 작품. 지하층에서 만날 수 있다. 김은영 선임기자 미국 극사실주의 조각가 듀안 핸슨의 작품. 지하층에서 만날 수 있다. 김은영 선임기자

문화와 예술의 힘이 넘치는 도시

장학민 시인은 파리를 떠나면서 이런 소감을 전해 왔다. “누군가 유명한 작품에는 얽힌 이야기가 있어서 그만한 유명세가 있다고 했다.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희소성을 더하고 유명세를 더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게 되는 거라고. 그것이 문화와 예술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것도 지혜라고 생각하며, 내가 사는 도시 부산에도 이러한 것을 남기고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그리고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피노가 “예술이 우리에게 제기하고 질문을 대중과 공유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시작한 문화 프로젝트의 의미”라는 의미심장한 말도 했지만, 장 시인은 진작에 그 의미를 간파한 듯하다. 좋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는 것 못지않게 우리 걸로 소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이리라. 여든이 넘어서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도시 파리의 심장부에 미술관을 열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컬렉션을 보여주겠다는 꿈을 이룬 피노처럼 우리 청년작가들도 각자 꿈 하나쯤은 갖고 돌아왔으리라 생각한다. 파리가 부러운 이유도, 바로 자유와 예술, 문화와 사랑 그리고 낭만이 살아 있는 도시이기 때문일 테니까.

파리(프랑스)/글·사진=김은영 선임기자

※이 기사는 (사)부산예술후원회가 지원했습니다.


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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