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구절초(九節草) / 박용래(1925~1980)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달여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춧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추분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 시집 〈백발의 꽃대궁〉(1979) 중에서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 이 말은 괴테의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파우스트의 영혼을 여성적인 것이 구원한다는 내용이다. 박용래 시인이 간절히 부르는 ‘누이야’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스산해지는 가을의 길목에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줄 수 있는 존재는 ‘누이’일 수밖에 없다. 환하게 눈부셔 자신의 어둑한 눈을 밝게 하고, 차가워지는 마음에 불을 지펴 삶의 활기를 북돋아 주는 구원의 여신!
구절초가 그런 꽃이다. 들국화로 불리기도 하는 구절초는 추워지는 계절에 환한 낯빛으로 ‘도깨비불이 스러지는’ 무덤가나 산자락에 피어 고운 자태를 자랑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몸짓은 하얀 세일러복의 ‘여학생’ 같다. 세월을 이기지 못한 사람에게 그것은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으로 영원한 청초함이 된다.
김경복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