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영화상 2023 심사평] 무성한 ‘위기의 말’ 속에서 키운 한국 영화 저력 돋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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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이주현 편집장

씨네21 이주현 편집장. 본인 제공 씨네21 이주현 편집장. 본인 제공

한국 영화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2023년 여름 대작들의 흥행 성적 또한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럼에도 장르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기술적으로 빼어난 성취를 이룬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뚝심 있게 영화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감독들이 있었고, 눈에 띄는 신인들의 등장을 목격할 수 있어 반가웠다. 그렇기에 올해의 한국 영화에서 희망을 본다.

최우수작품상은 이견 없이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결정했다. 남우주연상과 촬영상, 여자 올해의 스타상까지 차지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올해 부일영화상의 유일한 4관왕이다. 계급 상승의 욕망이 집약된 아파트를 배경으로 재난 상황 속 인간의 본성을 들추는 영화는 사유할 거리가 충분한 한국적 재난영화이자 재미와 의미를 모두 챙긴 웰메이드 상업영화다. 제작사의 기획력과 감독의 연출력이 모두 돋보이는 수작으로 촬영, 미술, 분장, VFX 등 수준 높은 프로덕션 또한 영화 전체의 완성도를 높였다.

남우주연상 수상자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또 한 번 괴물 같은 연기를 보여준 이병헌이다. 그가 연기한 영탁은 내 집(아파트)을 지켜야 한다는 맹목적 목표를 가진 절박한 남자다. 이병헌은 이 범상치 않은 캐릭터를 투박하면서도 섬세하게, 뜨겁고도 차갑게 연기한다. 연기 경력 30년이 넘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에게서 이런 원시적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더불어 배우들의 회색빛 얼굴에 깊은 페이소스를 드리우게 하고, 비현실적 공간이 현실적인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영화의 빛과 프레임을 가다듬은 조형래 촬영감독의 촬영 또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최우수감독상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다음 소희’의 정주리 감독이 차지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함께 올해의 또 다른 수확이라 할 수 있는 ‘다음 소희’의 정주리 감독에게 다수의 심사위원이 지지를 보냈다. 영화 개봉 뒤 ‘다음 소희 방지법’이 마련되는 등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다음 소희’는 동시대 아픔을 직시하며 영화 예술의 사회적 실천을 보여준다. 음지의 이야기를 양지로 끌어낸 정주리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다음 소희’에서 투명한 얼굴과 반짝이는 연기로 극 중 소희를 ‘우리 모두의 소희’로 만든 김시은에게는 신인여자연기상을 수여한다. 소희라는 인물이 오랜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은 김시은의 연기 덕이다.

여우주연상은 ‘비닐하우스’의 김서형으로 결정했다. ‘비닐하우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김서형의 존재에 의지하는 영화다. 배우의 기여도도 나무랄 데 없지만, 그는 전에 본 적 없는 다채로운 표정과 목소리로 고단한 짐을 짊어진 한 여성의 희망과 절망을 신중히 꺼내 보인다. 김서형의 고심이 담긴 연기는 박수받기 충분하다. 조연상은 ‘밀수’의 배우들 몫이었다. ‘밀수’에서 반전의 안타고니스트로서 무시무시한 중년의 악역 탄생을 예고한 김종수에게 남우조연상, 갈매기 눈썹과 능청스런 연기로 영화에 활력을 더한 고민시에게 여우조연상을 수여한다. 신인남자연기상 주인공은 ‘귀공자’의 김선호다. 소년 만화 주인공 같은 모습으로 광란의 질주를 하는 그의 모습은 퍽 신선했으며 스크린 장악력 또한 인상적이었다.

신인감독상은 각축 끝에 ‘비밀의 언덕’ 이지은 감독에게 돌아갔다. 아이들이 주인공인 일련의 영화 중에서도 돋보이는 성숙함을 갖춘 영화이기에 그의 미래에 기대감을 품게 된다. 범상치 않은 모녀 관계를 그려 보이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버거움을 지독하게 파고든 김세인 감독의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는 각본상을 수여한다. 음악상은 상황의 긴박함을 고조시키고 감정의 여운을 배가하는 세련된 시대극 음악을 선보인 ‘유령’, 미술·기술상은 달과 우주로 성큼 나아가 미지의 공간을 사실적으로 구현한 ‘더 문’에 돌아갔다.

유현목 영화예술상은 배우 배두나로 결정했다. 이제껏 영화감독, 제작자 등이 받았던 이 상을 배우가 수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 배두나는 ‘다음 소희’에서 10대 소녀의 죽음을 방치한 어른들에게 분노하는 경찰을 연기했다. 정주리 감독의 전작 ‘도희야’에서도 그는 최소한의 도덕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을 맡았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영화에 기꺼이 자신의 재능을 바친 배두나 덕에 두 영화 모두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소규모 독립예술영화와 거대 예산이 투입된 상업영화를 균형 있게 오가고, 한국과 해외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을 시험하고 단련하고 ‘배우’라는 업을 진지하게 즐기는 배두나에게 유현목 영화예술상은 더없이 잘 어울린다. 국내외에서 진취적인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그의 도전정신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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