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평범한 일상의 특별한 기록
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메노키오는 16세기 이탈리아 프리울리에 살았던 방앗간 지기다.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구더기가 나오는 것처럼, 세상은 흙과 공기, 물과 불이 뒤섞인 카오스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맙소사! 때는 여전히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엄혹한 중세사회가 아닌가. 그는 결국 종교재판을 받고 처형당하고 말았다. 카를로 긴즈부르크는 이단 재판 기록에 남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역사서를 썼다. 미시사의 대표작 〈치즈와 구더기〉다. 기존의 사회사가 쉽게 지나쳤던 개인과 일상적 삶이 비로소 주목받게 된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에 놓여 있던 일상의 복원은 역사의 지평을 한껏 확장했다.
얼마 전 부산박물관에서 사진전 ‘1970년 부산, 평범한 일상 특별한 시선’이 열렸다. 평화봉사단으로 부산에 온 미국인 게리 민티어 부부가 찍은 사진이다. 이들은 1969년부터 1970년까지 서구 동대신동 2층 주택에 살면서 물설고 낯선 부산의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외국산 통조림이 가득한 깡통시장 진열대와 조기 명태 갈치가 즐비한 어물전, 재래식 화장실과 석유풍로, 부영극장 간판과 범어사 안내 포스터, 거리에서 잠든 지게꾼과 엿장수, 만화경을 보려고 몰려든 동네 꼬마들.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한 세계, 어쩌면 초라하기까지 한 시대의 풍경을 박물관에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부산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외국인의 시선으로 포착한 ‘특별한’ 전시회였다.
사료는 역사서술의 원천이다. 세월의 풍화에 마멸되거나 잊힌 기억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제껏 일상의 기록과 거리의 기억들은 소홀하게 취급되었다. 민티어 부부의 사진은 공식적 기억이 증언하지 못하는 한 시대의 풍경을 환하게 소환한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살림살이에 건넨 눈길은 더없이 따뜻하고도 새로웠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는 아이들, 가난해도 마음을 나누는 시끌벅적한 시장 풍경은 잊혀진 부산의 일상이다. 사진은 민티어 부부의 젊은 날의 추억이자 산업화시기 부산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통로다.
“부산의 풍경, 냄새, 소음은 모두 나의 눈과 코와 귀를 자극하는 음악과 같았습니다. 한 번만 더 그때의 거리를 거닐 수 있다면 너무나 멋진 일일 것입니다.” 귀국 후에도 민티어 부부는 부산을 내내 그리워했다. 이들이 기록한 부산은 기억과 기록의 자리에서 밀려난 부산의 정체성이다. 분단국가의 변방 도시가 아니라 성장과 번영으로 나아가는 소란한 공간, 짠내와 비릿함으로 가득할지언정 온기가 넘치는 부산. 사진 한 장이 시대의 증언과 기록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것인가.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필요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