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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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죽음’,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의 비극
애도조차 자기기만 숨기는 휘장일 뿐
무감한 시대, 진정한 위로는 어디에

톨스토이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를테면 키제베터 논리학에서 배운 삼단논법을 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명백한 사실이 카이사르에게만 해당되지 자신에게는 도무지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 프랑스 철학자 장켈레비치는 저서 〈죽음〉에서 톨스토이를 인용하면서 ‘그러한 삼단논법에는 내가 믿을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속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죽음’, 이 두 글자는 너무나도 낡고 흔해빠진 말이어서 그것이 뜻하는 실체적인 의미는 곧잘 흡수되지 않는다. 마치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란 메뉴를 떠올리듯, 그것은 일상에서 필요에 따라 호출되곤 하는 ‘단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청년 고독사 비율이 역대 최대치라거나, 산업현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동자에 관한 뉴스를 들으면 당장 분노와 슬픔이 밀려와서 현실사회를 성토하지만 그때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고 가장 멀리하지만, 죽음은 끼니마다 먹게 되는 밥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수다의 테이블’ 위에 마련되는 것이다.


우리가 솔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자기기만’에 익숙해진 탓에 늘 찾아서 걸치게 되는 자신의 옷처럼 편안해 질대로 편안해진 습성을 생각한다. 정의와 평화, 그리고 사랑을 설파하면서 자신의 시민윤리와 덕목을 은근히 과시하지만, 사실 그도 자기기만의 수렁에 빠져 있다는 사실만큼은 철저하게 숨기는 게 사람이다.

며칠 전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시인이 죽었다. 코로나 백신 부작용에 따른 합병증 진단을 받고 사투를 벌이다가 그리된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실감은 심리적·물리적 거리에 비례한다. 가족이나 친척의 죽음은 지인의 죽음과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슬픔의 결은 또 다를 것이다. 중동 국가의 어느 왕자의 죽음에 관한 소식은, 귓등에 윙윙거리는 귀찮은 모기를 자신의 손바닥으로 ‘처리’한 뒤 느끼는 ‘애석한 쾌감’만치도 훨씬 못 미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렇듯 죽음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 비껴가면서 늘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삼단논법의 명쾌한 전제에 이은 결론인 것이다. 죽음이라는 결론은 너무도 명백해서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입술을 경유해 몸속으로 들어가리란 예상보다도 더욱 확실한 사실이다.

그렇게도 살뜰하게 나를 대했던 시인의 사망 소식을 들어도 ‘자기기만’의 안락한 습성마저 깨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버선발로 상가에 들어가 통곡을 해도 모자랄 인연이었는데도 내 있는 곳과 장례식장의 거리를 가늠했으며, 휴대전화 부고 앱을 통해 조의금을 전달하면서 액수를 잠시 고민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의 생전 모습과 지난날의 인연을 떠올리며 발인 날까지 ‘경건하게’ 지내자 생각하는 것만으로 애써 애도의 뜻을 지켰다 자위했으니 말이다.

죽음은 언제나 타인에게만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 생각하지만, 정작 나 자신이 그 상황에 처했을 때에는 다른 진실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죽음, 너는 나를 속였어”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속인 주체는 죽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명명백백한 진실이지만 자신에게만큼은 맨 나중에 찾아오리라는 착각을 주곤 하는 ‘죽음’은 우리 사회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애도의 언어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란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말이 언제부터 ‘상용’되기 시작했는지는 모르나, 아마도 장례식장에서 부고 화환이나 부의금 봉투에 기재된 이후 널리 퍼진 듯하다. 마치 식당 정수기 위에 표기된 문구인 ‘물은 셀프입니다’처럼 말이다. 자신에게는 결코 찾아오지 않을 듯한 상태인 ‘죽음’이 ‘삼가’와 ‘고인’과 ‘명복’이라는, 죽음이란 말보다도 더 낯설고 덜 사용하는 세 단어로 분화되면서 죽음은 비로소 삼단논법의 명쾌한 논리처럼 ‘대상화’된다. 대상화된 죽음은 물기가 빠져나가 바싹 말라버린 수건처럼 그저 자신 앞에 놓인 ‘사물’이 되는 것이다.

SNS 부고 소식에 천편일률적으로 주렁주렁 매달리는 문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의 발화 주체들은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애도의 뜻을 전달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그것 말고는 전달할 마음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을 둘러싼 이의나 문제 제기가 한밤 공동묘지의 고요처럼 증발해 버린 목소리가 되고, 상투적인 애도의 말이 서로 질세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국에 소리를 보태 자신의 본심을 표시했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죽음’은 늘 자기와는 상관없는 타인의 비극일 뿐이다. 죽음에 대한 애도조차 자기기만을 숨기는 휘장이 되는 사회에서 진정한 위로는 어디에 숨어서 웅크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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