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장 “이념과 관계없이 피해 진상규명을”
“늦게 오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하지요. 아직까지 한국전쟁 당시 피해자의 5%밖에 밝혀지지 않았어요. 국군, 빨치산을 막론하고 국가 차원에서 피해자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합니다.”
박동기(사진) 남녘현대사연구소장은 6·25 전쟁 전후 빨치산과 군경의 충돌이 격했던 당시 피해에 대한 조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밝혔다. 박 소장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지리산 빨치산 등을 연구하는 데 힘써 왔다.
박 소장은 빨치산이 결국 남북의 정치적인 이득에 따라 파생된 단체라 설명한다. 1948년 이승만과 한민당 등이 남한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노선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해 제주4·3사건이 발생했고, 이것이 10·19 여순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빨치산 활동까지 연결된다는 것이다.
특히 호남 지역에서 국군과 빨치산의 전투로 인해 많은 피해자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정학적으로 호남은 평야 지대라 농경지 비중이 높고, 그만큼 소작농들이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공산당의 주장에 동조할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는 “국군으로부터 가족이 살해당한 피해자, 빨치산의 요구에 못 이겨 입산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피해자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보다 훨씬 많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빨치산의 구체적인 전투과정과 피해 상황 등을 밝힐 연구는 유독 미진했다고 설명했다. 사회에 만연한 ‘레드 트라우마’ 때문에 공산당과 관련된 역사적 연구를 하려는 사람도 없고, 그와 관련된 논문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증언을 해 줄 피해자들은 마을 이웃들이 이유 없이 죽어가는 장면을 목격해 트라우마가 심하다는 점, 가족이 모조리 죽임을 당한 탓에 당시 상황을 설명할 이가 남아있지 않은 점 등을 꼽았다.
박 소장에 따르면 당시 민간인 학살의 주축은 아이러니하게도 ‘국군’이었다. 대략 국군이 20명을 살해하면 빨치산에 의해서는 1명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박 소장은 “빨치산과의 전투는 그 자체로 이념으로 갈라선 시대의 아픔을 오롯이 보여준다”고 말했다. 유연재 광주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