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냉전에 ‘헛바퀴’ 유엔… “국제사회 작동 방식 중대 변화 중”
반성·우려 봇물 78차 유엔총회
“결국 아무 일도 성사 안 되는 곳”
영 일간, 유엔 둘러싼 변화 분석
“희미해진 국제기구 운명 될지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개최 중인 제78차 유엔총회가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갈등 등으로 인한 ‘신냉전’ 기류 속에서 무기력한 상태에 빠졌다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19일(현지 시간) 진단했다.
통상 유엔총회가 열리면 전세계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열띤 논쟁을 벌이곤 했으나, 올해는 시급한 글로벌 현안이 산적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확연히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면이 바로 이날 진행되는 유엔총회의 ‘하이라이트’ 일반토의다.
총회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 중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제외하고 중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4개국 정상이 참석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FT는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부재는 안보리가 더 이상 지정학적 문제를 해결할 최고의 무대가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보여준다”고 짚었다.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의 매튜 크로닉은 “이것이야말로 이 기구의 가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각국 지도자가 이곳에 와서 공개 연설을 하곤 하지만, 결국 아무 일도 성사되지는 않는 장소”라고 꼬집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나 주요 7개국(G7) 등 같은 생각을 가진 강대국들로 구성된 국제기구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만큼 제대로 기능하지만, 신냉전 기류 속에서 여러 적대적 강대국을 한데 모아 놓은 유엔 같은 기구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요 20개국(G20)의 경우 좋은 토론의 장이 될 수 있으나, 구속력을 갖는 규정이나 각국의 결의를 수행할 집행부도 없다는 점에서 유엔을 대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FT는 이 같은 현상이 단순히 유엔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작동 방식에 중대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외교가에선 동서 냉전이 한창이던 1970∼80년대를 제외하면 이런 교착 상태가 거의 없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도 이날 저녁 유엔총회 일반토의 연설에서 “유엔은 다극화된 세계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안보리 구성보다 이를 더 명백히 드러내는 곳은 없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안보리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성이 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엔 주재 영국대사를 지낸 제러미 그린스톡은 유엔이 앞서 희미해져 간 국제기구의 운명을 따라갈 수 있다면서도 “유엔은 약해졌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엄청나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린스톡은 “집단주의 정신이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며 “유엔이 일할 곳이 G20이 될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일반토의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다음으로 연설에 나선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의 연설이 눈길을 끌었다.
미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페트로 대통령은 “그들(미국)이 사람들을 말에 태워 손에 채찍을 쥐고 사슬을 가지고 (이주민들을)쫓게 했다”고 주장했다. 연설은 콜롬비아와 파나마의 국경지대인 ‘다리엔 갭’ 정글을 넘어 미국으로 향하기 위해 지난 2년간 수십만 명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들어 콜롬비아가 인도주의 위기를 겪는 가운데 나왔다. 그는 이날 인류가 위기의 근원인 기후변화 대신 전쟁에만 힘을 쏟아왔다고 특유의 서사적 표현을 구사하며 비판했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