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또 ‘기후 유턴’… 내연기관차 판매 5년 더 연장
리시 수낵 총리, 판매 중단 연기
과도한 목표 국민에 부담 이유
전기차업계·보수당 내부도 반발
지지율 추락 극복 승부수 분석도
최근 탄광 개발을 재개하는 등 ‘기후후퇴’ 정책을 거듭해 비판을 받고 있는 영국이 내연기관차 판매 중단 시기를 5년 더 늦추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20일(현지 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과 파이낸셜타임스, BBC방송 등에 따르면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이날 내연기관을 사용하는 신차 판매 중단 시한을 2030년에서 2035년으로 연기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정부가 마련해 놓은 기후변화 정책 시행 일정이 너무 촉박해 국민의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자칫 과도한 목표 설정으로 기후변화 정책 목표 달성이 무산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가정용 가스보일러 설치를 2035년까지 100% 중단하겠다는 계획도 80% 폐지로 완화했다. 2026년 중단하기로 했던 석유 보일러 설치도 2035년까지 시행 시기를 미뤘다. 주택의 단열 효율을 일정 수준 이상 높이지 않은 소유주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려 했던 계획도 취소했다. 수낵 총리는 다만 법적 구속력이 있는 2050년 탄소중립 목표는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수낵 총리는 “영국이 세계의 다른 모든 국가보다 훨씬 앞서 있기 때문에 목표 달성에 있어 더 느린 진전을 이룰 여유가 있다”고 자신했다.
수낵 총리는 이번 발표가 퇴보가 아닌 ‘실용적이고 균형 잡힌’ 조치라고 항변했지만 영국 내에서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수낵 총리는 BBC가 전날 관련 문건을 입수해 보도하자, 급히 늦은 저녁 성명을 발표했다. BBC는 “선언문의 몇 줄은 믿을 수 없어 눈을 비비게 만들기에 충분했다”고 했다.
이날 수낵 총리의 발표가 있은 후 영국 노동당과 녹색당은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 녹색당은 수낵 총리 계획이 “절박하고 위험한 유턴”이라고 말했고 가디언은 “총선 전 노동당과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기후 공약에 대한 대대적인 유턴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환경단체와 야당은 물론이고 보리스 존슨 전 총리 등 보수당 내에서마저 비판이 나오고 있다. 존슨 전 총리는 “지금 우리는 흔들릴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영국 정부의 갑작스런 기조 변화에 전기차 생산에 투자했던 업계도 반발하고 있다. 이날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기아차는 성명에서 영국 정부의 이번 조치가 자동차 업계와 소비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공급망을 방해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기아는 “영국 정부가 계획을 연기하는 것을 보며 실망스럽다. 많은 이들이 이에 따라 노력하고 투자했다”며 “복잡한 공급망 협상과 제품 계획에 변화를 가져오고 소비자와 업계에 혼란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2022년 기준 연간 12만 6000대 이상의 차량을 영국에 판매하는 자동차 브랜드 포드도 “영국의 이러한 변화가 전기차로의 전환을 저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수낵 총리의 이 같은 결정이 총선을 앞두고 지지율 추락세를 회복하기 위한 승부수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가계 부담이 될 수 있는 일부 녹색 정책을 축소하면 높은 인플레이션과 정체된 경제 성장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BBC는 “수낵이 기후가 단지 보수당과 노동당 사이에 경계선을 긋기 위한 정치적 장치일 뿐이라고 잘못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실패할 것”이라면서 “그것(이번 결정)은 그와 그가 통치하려는 사람 사이의 격차를 더 벌려 놓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