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꾼 이자람이 정장에 운동화 신고 무대 오른 이유는 [부산문화 백스테이지]
국립부산국악원, 23일 ‘이자람의 판소리 라운지’ 개최
시대 감수성 맞지 않은 내용 불편… 창작 판소리 관심
판소리 시연과 다양한 이야기로 판소리 재미 알려줘
"판소리 알리는 통로 허브 역할과 공연에 치중할 터”
소리꾼 이자람(44)이 정장에 운동화를 신고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 무대에 올랐다. 머리는 뒤로 질끈 묶었다. 중간 가르마는 탔지만 쪽머리를 한 건 아니다. 한 손엔 부채를 쥐고 있다. 고수 이준영도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위를 지켰다. 객석에는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여느 공연장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지난 23일 오후 7시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에서 열린 ‘이자람의 판소리 라운지’ 풍경이다.
이자람은 이날 1시간 30분에 걸쳐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판소리를 어떻게 사랑하며, 판소리는 이런 것이구나에 대해서 조목조목 들려줬다. 중간중간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판소리 시연도 이어졌다. 그때마다 박수가 터져 나오고, ‘얼쑤’ ‘좋~다’ 추임새도 들렸다.
그가 제시한 첫 주제는 ‘판소리, 당신의 삶에 얼마나 묻어 있나요?’였다. 열 살 때 처음으로 판소리를 접한 이후 지금까지도 받는 질문이 있다며 말을 꺼냈다. 그중에는 “왜 한복을 안 입고 다니세요”“판소리하는 분도 피자 드세요” “아, 콜라나 커피도 마시나요” 등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국악한마당’ 같은 데 가면 쪽 찐 머리로 한복을 입고, 연령대 높은 분도 만날 수 있고, 피 터지게 소리만 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기에 일부러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는 거다.
서울대 국악과 재학 시절에도 이자람은 일부러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서울 인사동 거리 나가서 판소리를 하곤 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어랏, 어린애가, 청바지를 입고도 판소리를 하네!’ ‘내 옆집 꼬맹이도 판소리할 수 있는 거구나’라며 판소리라는 예술 장르가 우리 삶과 먼 게 아니구나를 조금씩 인식하게 된 거죠. 근래에는 젊은 감각으로도 판소리하는구나며 점차 저변이 확대되는 추세입니다.”
이어 이자람은 조선 후기 17세기에 판소리라는 이름이 생기고, 18세기엔 명창이 등장했으며, 너도나도 한양(서울)으로 소리꾼이 몰리게 된 사연이나 일제강점기 고음반 명창 중 일부가 아편에 빠져든 안타까운 이야기며
소리꾼이 먹고살기 위해 공연을 하기 시작한 게 창극으로 발전해 간 배경도 흥미진진하게 들려줬다.
“사실상 대한민국이 소리꾼이 잘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닙니다. 이런 자리가 귀해요. 많이 알아야 즐길 수 있고, 즐기는 사람이 많아져야 소리꾼이 설 무대가 늘어나거든요. 저는 그 무대를 늘리기 위한 일환으로 여러분에게 판소리 이야기를 하러 온 것입니다.”
이자람에 따르면 판소리는 소리꾼이 하는 소리와 총 7개의 장단으로 이뤄진다. 제일 긴 판소리는 동초제 춘향가로 8시간이 된다. 우리가 뻔히 아는 내용인데도 이야기꾼의 성질이 그대로 들어 있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사람이,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재미가 달라지는 요소가 그대로 적용된다. 재밌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본인도 알수록 신기한 게 판소리라고 전했다. 그리고 나서 이자람은 7개의 장단, 즉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엇모리, 세마치, 휘몰이에 대해 일일이 예를 들어가며 소리를 시연했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설명에 시연까지 더해지니 재미가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장단만으로도 여러분을 순식간에 다른 공간으로 데려갑니다. 자 이제 심청이가 드디어 배를 타고 떠나갑니다. 진양 장단은 주로 경치를 들러보는 대목이나 큰 사건이 벌어지기 전 풍전등화의 상황을 느린 장단으로 슬슬 보여줍니다…중모리는 판소리의 심장 장단입니다. 정말 멋들어지게 화려하게 짜여 있거든요. 이쯤에서 판소리의 멋을 보여줘야겠다 싶으면 중모리를 사용합니다. 그럼 이 대목에서 제 실력도 한번 보여 드릴까요? 판소리 5바탕 중에 가장 아름다운 ‘적벽가’ 중 ‘새타령’입니다.”
경쾌하고 기분 좋은 중중모리, 쓰임새가 정말 많은 자진모리,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하거나 상황이 급변할 때 엇모리, 가장 빠른 장단으로 몰아치는 장면에 자주 나오는 휘모리 등 그의 설명과 시연이 이어지자 객석에선 “잘한다” 추임새가 절로 쏟아졌다.
이자람의 지적도 있었지만, 판소리에 나오는 사설(가사) 중에는 한문이나 고사성어 등 알아듣기 어려운 대목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수궁가’ 중 눈대목(하이라이트)인 ‘고고천변’을 들려준 뒤 이자람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기 어려울 겁니다. 눈이 작고 다리가 짧다는 표현으로 ‘은목단족’이란 가사가 나오는데 그냥 들으면 잘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제가 더 열심히 노는 겁니다. 뭔지 몰라도 경치를 보고 있구나 등으로 상상하시라고요. 이렇게 에너지를 주고받으면서 느끼는 것이 판소리입니다.”
이자람에게도 고민이 없지 않다. 어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선생님이 하는 모든 판소리를 받아들였지만, 소리 연습을 할수록 불편한 마음도 커져 갔다.
“요즘 같은 젠더감수성엔 전혀 맞지 않는데 놀부가 흥부 부인에게 비하 조로 말하거나 춘향과 이몽룡은 동갑인데 한 사람은 존댓말을 쓰고, 다른 한 사람은 말을 놓아요. 또 아동학대가 될 수도 있는 아홉 살 난 심청이가 동냥하러 가는 등등으로요. 조선시대는 그랬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잖아요. 시대적 감수성이 불편해지기 시작한 거죠. 창작 판소리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물론 전통 판소리도 아름답고 훌륭해요. 그런데 뭔가 갈증이 나기 시작하더라고요.”
소리꾼 이자람이 창작 판소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였다. 그리고 이자람이 만든 여섯 번째 창작 판소리 중 하나인 ‘이방인의 노래’ 중 1장 대통령을 들려줬다. ‘이방인의 노래’는 남미 문학의 거장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소설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을 판소리로 재창작한 작품이다. 감흥이 또 달랐다.
이자람은 ‘이방인의 노래’ 외에도 ‘사천가’ ‘억척가’ ‘노인과 바다’ 등을 창작했다. 또 국립창극단 주요 작품 ‘패왕별희’ ‘창극 정년이’ 등이 그의 작창과 작곡으로 만들어졌다. 오는 11월 7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최할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순신’에도 극의 흐름을 이끄는 ‘무인’ 역으로 무대에 오른다.
이 밖에도 이자람은 ‘소리꾼의 몸과 소리꾼의 체력’ ‘진짜로 똥물을 먹나요?’ ‘인간문화재는 뭐가 좋은가’ 등 총 8가지 주제에 대한 자기 생각을 풀어냈다. 이자람이 무대를 떠나기 직전 들려준 마지막 이야기는 이날의 공연과도 맥이 닿아 있어 전한다.
“인간문화재가 되고 싶냐면 저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저는 공연하느라 바빠서 누구를 교육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도 그분들이 있어서 이렇게 판소리가 지켜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판소리를 알리고 해야 판소리하는 수많은 이수자와 전수 교육 선생님께 많은 관객이 흘러 들어갈 테니까요. 저는 그 통로의 허브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제 사명은 그런 것 같습니다. 과거부터 내려오는 ‘1고수 2명창 3청중’이란 말도 있지만 오늘 훌륭한 청중이 되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엔 소리꾼으로 편하게 만나겠습니다.”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