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철거할 흉상조차 없는 여성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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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숙 동아대 젠더·어펙트연구소 조교수

여성사를 전공한 나는 자료를 통해 많은 여성을 만난다. 기존 역사책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 이들이지만, 역경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현명함, 자신을 위한 삶에 안주하지 않는 헌신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곤 한다.

어느 날 일제강점기 가족 내 폭력을 다룬 신문 자료를 뒤지던 중 기막힌 사연 하나를 발견했다. 1906년 신의주에서 태어난 이 여성은 가난한 집 딸로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됐다. 노름으로 빚을 잔뜩 진 아버지는 겨우 여섯 살 딸을 팔아 빚을 갚으려 했던 파렴치한 인간이었다. 다행히 어머니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딸은 홀로 경성으로 가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학교를 졸업한 이 여성은 자유연애 끝에 결혼한 남편과 중국 광둥대학에서 수학했다.

유학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온 여성은 어머니 사후 홀로 지내는 아버지를 외면하지 못해 자신의 집으로 모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동안 변한 게 없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사위가 검거되자 딸에게 이혼을 강요하며 ‘돈 많은 사람 첩으로 들어가든지 매춘부 생활을 해서라도 자신을 잘 공양’하라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칼부림까지 서슴지 않던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딸은 결국 갓난아기를 둘러업고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시기 여성들의 열악한 상황을 잘 보여 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기사의 주인공이 박호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박호진이 누구인가. 1920년대 중국 유학을 다녀온 신여성으로 사회주의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근우회 집행위원장을 지내고 신간회에서 활동하며 지하조직인 전북공산주의자협의회 결성에도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 근대 초 신여성이라면 그저 집안이 좋아 유학까지 다녀와 승승장구한 엘리트라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런 이도 있었다. 그러나 가난과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삶 속에서도 민족의 독립과 여성 해방을 위해 싸운 박호진의 생애는 그야말로 소외된 자의 자기해방 몸부림이 어떻게 개인을 넘어 사회구조적 해방을 위한 헌신으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 준다.

홍범도 동상 철거를 두고 시끄럽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조금만 알아도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이유로 동상을 육사에 둘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사회주의는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수용할 수 있는 하나의 사상이었고, 소련은 약소국의 독립을 지원한 반제국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오늘날의 냉전적 시각으로 단죄하는 것은 난센스에 불과하다. 이런 비역사적인 발상이 횡행하는 현실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기억해 둘 것이 있다. 여전히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흉상은커녕 서훈조차 받지 못한 채 잊혀 있다는 것을. 그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몫이자 의무라는 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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