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민간교향악단의 빛과 그늘, 열정과 후원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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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1935년 3월 30일 자 ‘부산일보’에 실린 부산관현악단 제2회 연주회 광고. 1935년 3월 30일 자 ‘부산일보’에 실린 부산관현악단 제2회 연주회 광고.

빈과 베를린, 뮌헨의 랜드마크는 물리적 건축물이 아니라 도시 곳곳을 흐르는 음악이다. 선율이 도시의 유려한 아우라를 형성한다. 머지않아 부산에도 오페라하우스와 아트센터가 건립될 예정이다. 음악의 중심지(music metropolis) 부산을 상상하는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음악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부산을 찾는 발걸음으로 소란할 수 있을까. 흔히 교향악단의 수준은 곧 도시의 문화적 수준이라 말한다. 부산음악의 바다에서 숱한 음악단체들이 선율을 싣고 밀려들었다 저 아득한 등대의 불빛처럼 사라지기도 했다. 물결 드높은 부산음악사의 전통에서 부산의 오늘과 내일을 읽는다.

1935년 3월 부산공회당에서 부산관현악단 정기연주회가 열렸다. 1934년 수해 의연금을 모으기 위해 결성한 이후 서양음악 애호가들의 후원으로 정식 연주단체로 발돋움했다. 언론에서는 ‘조선 유일의 관현악단’이라 소개했다. 그 무렵 재부산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한 부산방송관현악단 악장으로 활동한 김학성은 1947년 5월 부산관현악단을 설립했다. 이듬해 6월 마산, 통영, 진해 순회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다 한국전쟁기에는 육군군악학교 연주대와 결합하여 명맥을 이어나갔다. 서울의 고려교향악단이 미국인 후원회와 미군정 학무국의 지원에 의존했다면, 이 단체는 오롯이 음악적 열정만으로 음악문화를 확산하는 데 이바지했다.

전통이란 이토록 무거운 법이다. 서울을 제외하고 지역 최초로 부산이 시립교향악단을 창단했다는 사실을 그저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민간교향악단도 마찬가지다. 1981년 7월 유호석이 주도한 부산관현악단은 국립심포니로 이름을 바꾼 코리안심포니보다도 4년 앞서 창단했다. 이 단체는 25년간 활동하다 경영난으로 긴 휴지기에 들어 지금껏 활동을 재개하지 않고 있다. 공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민간교향악단의 운명이었을까. 음악적 열정만으로 단체를 꾸리고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 9월 26일 열린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 30주년 기념 음악회는 객석을 꽉 채운 열기로 가득했다. 맹장수술 직후인데도 열정적으로 지휘한 오충근의 인사에서 민간교향악단이 걸어온 고단한 여정과 미래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지역사회의 후원이 30년 동안 단체를 이끈 힘이었다며 감사의 뜻을 건넸다. 단체의 역정을 자축하는 앙코르곡 ‘생일축하 변주곡’이 마냥 환희에 찬 내일을 예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쁨과 걱정이 갈마들었다. 이즈음에도 부산에는 민간교향악단들이 그야말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유나이티드코리안오케스트라, 인코리안오케스트라, 네오필하모닉오케스트라. 부산의 문화적 자부심이자 음악도시 부산을 견인할 자산이다. 열정과 후원 사이, 부산음악의 썰물과 밀물 사이, 생각이 깊은 만큼 가을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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