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진의 여행 너머] 세계유산 보유 도시
스포츠라이프부 차장
지난여름, 제주도 반달살이를 하며 여러 오름을 올랐다. 그중 인상적이었던 오름을 꼽자면 단연 ‘거문오름’이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기도 한 거문오름은 짙푸른 숲이 검은 빛깔이라 원래 ‘검은오름’으로 불렸다. 그러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한자 표기가 가능하도록 거문으로 바꿨다고 한다.
“거문오름은 한국의 것이 아닙니다.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세계 모두의 것이 되었습니다.” 오름 탐방을 시작하기 전, 해설사의 설명에 귀가 번쩍 뜨였다. 한국에 있지만 세계인의 유산이 되었기에 더 아끼고 가꾸며 잘 보전해야 하는 존재로 거듭났다는 얘기다. 두 시간 남짓 탐방로를 따라 거문오름 속을 거닐며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에 더해 자부심이 일었다.
얼마 전 다시 한 번 자부심을 드높일 일이 있었다. 가야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문화유산 14개, 세계자연유산 2개를 보유한 나라가 됐다. 그런데 국민이 아닌 부산시민 입장에선 마냥 기뻐할 수 없다. 주요 가야고분군 중 하나인 복천동고분군이 빠졌기 때문이다. 부산 동래구에 있는 복천동고분군은 김해시 대성동고분군과 함께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유산이다. 하지만 고분군 주변의 아파트 재개발 사업이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2018년 등재 추진 목록에서 제외됐다. 결국 나머지 7개 고분군만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부산지역의 찬란한 가야 유적이 세계유산의 ‘걸림돌’이 돼버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등잔 밑이 어둡다지만, 부산에는 세계에 널리 알리고 보전할 만한 가치 있는 유산이 여럿 있다. 복천동고분군이 그렇고, 피란수도 관련 9곳도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그런데 정작 앞장서야 할 부산시의 행보는 오락가락이다. 고분군 주변 대규모 주택재개발 사업의 물꼬를 터 주는가 하면 최근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부산항 1부두에 도서관을 건립하려다 논란이 일기도 했다.
기초지자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중구청과 중구의회는 1부두 세계유산 등재에 꾸준히 반대 목소리를 내왔다. 복천동고분군이 있는 동래구는 동래읍성터에 있던 옛 청사를 허물고 신축하며 지하에 매장된 읍성 유적을 앞장서서 훼손하는 모양새다. 개발이냐 보존이냐 이분법을 넘어, 둘을 아우르는 묘수를 찾는 게 행정당국이 해야 할 일이다.
제주 토박이라던 거문오름 해설사의 자부심 가득한 표정이 떠오른다. 부산 사람들이 세계인을 맞이해 복천동고분군과 피란수도 유산을 안내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세계의 도시, 세계의 시민이 되기 위한 부산의 준비는 어디까지 왔을까.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