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리듬’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다 [전시를 듣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경남도립미술관 기획전 29일까지
동시대 미술 아카이브 ‘의미’ 찾기
이건용, 안규철, 방정아 작가 참여
실험미술·개념미술·리얼리즘미술
아카이빙의 다양한 접근방식 제안

경남도립미술관 '아카이브 리듬' 이건용 섹션 전시장 전경. 오금아 기자 경남도립미술관 '아카이브 리듬' 이건용 섹션 전시장 전경. 오금아 기자

‘동시대 미술관은 무엇을 어떻게 아카이빙할 수 있을까?’

경남도립미술관의 ‘아카이브 리듬’은 이 질문에서 시작된 기획전이다. 경남도립미술관은 2000년대 이후 국내 미술관이 주목하는 ‘미술 아카이브’에 대한 논의를 전시 형태로 풀어냈다. 미술 아카이브는 무엇이며, 어떤 잠재적 가능성을 가지며, 어떤 형식으로 가시화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한국의 실험미술, 개념미술, 리얼리즘미술 대표 작가를 전시에 소환했다. 이건용 작가, 안규철 작가, 방정아 작가가 바로 이들이다. 각 작가의 작품 세계를 통해 미술 아카이브의 의미를 찾아봤다.


이건용 '장소의 논리'(1975, 이완호 촬영).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제공 이건용 '장소의 논리'(1975, 이완호 촬영).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제공

이건용 “소중한 자료들로 당대의 정신과 방법론의 핵심적 진수를 재현하고 읽게 만든다.”


이건용은 한국 실험미술 1세대 작가이다. 이 작가는 1975년 백록화랑에서 신체를 이용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온전한 종이, 잘게 찢어 펼쳐진 종이, 비질로 한 구석에 모은 종이가 차지하고 있는 면적의 차이를 통해 동일한 사물이 조건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음을 보여준 ‘동일면적’과 같이 논리적 조건을 강조한 퍼포먼스를 작가는 ‘이벤트-로지컬’이라고 불렀다.

경남도립미술관 '아카이브 리듬' 이건용 섹션 전시장 전경. 오금아 기자 경남도립미술관 '아카이브 리듬' 이건용 섹션 전시장 전경. 오금아 기자

이건용 섹션에서는 100여 개가 넘는 이벤트-로지컬에 대한 기록물을 보여준다. 가정용 비디오 방식으로 기록된 시청각 자료와 각 퍼포먼스의 사진과 작가노트의 지시문, ‘신체드로잉’과 ‘바디스케이프’ 등 회화 작업도 같이 전시된다. 각각의 기록물이 퍼포먼스별로 배치되어 관람객이 작가의 의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각 퍼포먼스에 대한 설명과 함께 발표 장소와 작품명 변화, 이후 다른 전시에서의 재현 등에 대한 정보들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마치 한 작가의 작업이 시대별로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설명하는 소책자를 보는 느낌이다.


안규철 작가의 작품 '두 벌의 스웨터'. 오금아 기자 안규철 작가의 작품 '두 벌의 스웨터'. 오금아 기자

안규철 “작품이 실제 어떤 맥락에서 준비됐고, 어떤 맥락에서 그런 방식으로 전시되었는지 설명해 준다.”


안규철 작가는 1990년대 이후 한국 개념미술의 흐름을 주도한 작가이다.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에서 활동한 안 작가는 현실을 미술로 ‘이야기’하는 작가이다. 안규철 섹션에서는 이주와 정주를 의미하는 노와 삽을 결합한 ‘노/삽’이나 ‘바퀴 달린 공’ 등 오브제 작업과 건축적 설치 작업이자 관객 참여 작품인 ‘1000명의 책 Ⅱ’ 등이 소개된다. 독일에서 대학 마당에 ‘나인(nein)’을 반복해서 새긴 ‘아니다아니다아니다’에 사용한 도구에는 퍼포먼스 드로잉이 더해진다. 2012년 광주비엔날레 출품작인 ‘그들이 떠난 곳에서’는 당시 광주 시내 곳곳에 뿌렸지만 돌아오지 않은, 그래서 여전히 실종 상태인 그림 조각들까지 작품의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다.

경남도립미술관에 전시된 안규철 작가의 신작 '숲으로 돌아가지 못한 새'. 오금아 기자 경남도립미술관에 전시된 안규철 작가의 신작 '숲으로 돌아가지 못한 새'. 오금아 기자

이렇게 안 작가의 작품은 전통적으로 작품으로 인식되는 범주를 넘어선 비물질적인 것까지 포함한 아카이브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번 전시에서 안 작가는 신작 ‘숲으로 돌아가지 못한 새’를 선보였다. 실제 숲이 아닌 그림에 새가 부딪쳐 떨어진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은 실제와 허구가 구분되지 않는 것의 위험성, 참과 거짓이 구분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담겼다. 말과 이미지 사이의 보완 또는 충돌이 안 작가 작품의 원동력이다. 전시를 통해 작가 아이디어의 출발점과 작품 너머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경남도립미술관 '아카이브 리듬' 방정아 섹션에는 방 작가 어머니의 그림도 같이 소개된다. 오금아 기자 경남도립미술관 '아카이브 리듬' 방정아 섹션에는 방 작가 어머니의 그림도 같이 소개된다. 오금아 기자

방정아 “작품을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는 해설서이면서 완성물에 빠져있는 것을 보조해 준다.”


방정아 작가는 ‘지금, 여기’의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민중미술 2세대, 리얼리즘 회화 작가로 활동했다. 방 작가는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되는 여성상을 제시하고 생태, 환경에 대한 관심도 작업에 담아낸다. 방정아 섹션에서는 도서, 음악, 영화, 신문 기사, 토론, 답사, 여행 등 작가의 작업에 영향을 준 다양한 자료가 함께 소개된다.

전시장 입구에 방 작가 어머니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뒤늦게 화가의 꿈을 이룬 ‘엄마의 그림’은 방 작가의 그림과 많이 닮았다. 어머니의 그림을 보며,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보낸 시간은 방 작가에게 큰 영향을 줬다. 방 작가는 영화 ‘박쥐’에 나온 부산의 적산가옥 그림을 그리고, 밴드 앨범 제작에도 참여했다. 문학작품을 이미지화해 ‘책그림전’ 같은 전시도 열었다. ‘8부두’를 소재로 한 그림은 영상 작업으로도 이어졌다.

방정아 작가는 토다 밴드와 음반 콜라보 작업도 같이 했다. 오금아 기자 방정아 작가는 토다 밴드와 음반 콜라보 작업도 같이 했다. 오금아 기자

작가가 참조하고 영향을 받은 폭넓은 자료와 결과물을 통해 작업의 배경이나 변화 등을 짐작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 방 작가는 대형 신작 ‘주욱 미끄러지는 거야’를 소개했다. 창원 주남저수지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미끄러져 봐야 다른 세상도 보이고 다른 생각도 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방 작가는 보색 관계의 선을 이용해서 이차원의 화면을 삼차원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서 새로운 공간, 새로운 예술을 탐색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경남도립미술관 이미영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가 미술관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위한 기초적 연구 기반이 될 수 있는 ‘미술 아카이브’ 구축에 대한 필요성을 복기하고 그에 따른 방법론을 연구할 수 있는 하나의 단초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아카이브 리듬’전은 오는 29일까지 진행된다(10일은 대체 휴관). 055-254-4600.


안규철 작가. 오금아 기자 안규철 작가. 오금아 기자

<딸림1> 안규철 작가에게 듣는 전시작 소개

안 작가의 오브제 작업은 일상의 사물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노/삽’(1993)은 땅을 파서 집을 짓거나 나무를 심는 한 장소에 머무는데 주로 사용되는 도구 삽과, 머물지 않고 떠다니는데 사용되는 노가 한 몸으로 붙어 있는 상태이다. 안 작가는 “역설적이지만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는 이야기를 담아냈다”고 말했다.

검은 천이 달린 상자는 ‘상자속으로 사라진 사람’이라는 작품이다. 안 작가는 ‘상자를 통해서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상자를 열고 검정 천을 꺼내서 최대한 멀리까지 끌고 가면 어느 시점에는 사람의 몸이 상자보다 작아지는 시점이 온다. 원근법이 적용된 개념이다. 그때 천 안으로 기어 들어가면 다른 세상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 작가는 자신을 ‘말이 많은 작가’라고 표현했다. 안 작가의 개념미술을 다양한 자료로 풀어낸 이번 전시는 ‘이야기하는 작가’ 안규철에게 의미가 크다. 그는 “큐레이터의 배려와 노력으로 그동안 밖에 내놓지 못한 것들을 같이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예전에는 완결된 오브제가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그것을 둘러싼 작가의 생각이 더 중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변화하는 현대미술의 맥락 속에서 아카이빙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고 봅니다. 나는 개념적 작업을 해왔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일반 관객들은 작가가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이유를 궁금해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작품으로 다 이야기하면 되지’라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가 나의 작업 방식을 지지하고 후원해주는 변화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방정아 작가. 오금아 기자 방정아 작가. 오금아 기자

<딸림2> 방정아 작가에게 듣는 전시작 소개

방 작가의 신작 ‘주욱 미끄러지는 거야’은 창원 주남저수지를 배경으로 한다. 늦가을 연못 위에서 오리들의 움직임과 오그라든 연잎이 그려져 있다. ‘저수지의 식물들이 촘촘하게 있어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데 오리들이 미끄러지듯 쑤욱 진입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 방 작가는 “요즘 선에 천착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작품에서는 선에 레이어를 만들었어요. 뒷선과 앞선의 색을 보색으로 달리해서 사용하면 거리감이 나오거든요.” 방 작가는 선의 사용에서 거리가 생기면 이차원이 삼차원으로 변한다고 했다. “식물이 밀집된 곳으로 오리들이 들어가면서 공간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이 가로지르면서 정적인 공간에 동적인 움직임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방 작가의 세계 시리즈 1, 2, 3이 모두 소개된다. 방 작가는 “2008년 작품인데 그때 개인적으로 세상이 참 어둡게 보였다”며 “그래서 황량함을 많이 표현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방 작가는 이번에 전시된 작품과 자료를 보며 “내가 어느 결에서 어떻게 달라진 것인지 구분할 수 있도록 직관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좋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책, 영화, 음악과 메모, 원전에 대해 공부한 것들 등 내게 참 중요한 것들입니다. 아카이브에는 나의 백그라운드가 되는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완성물(작)에서 놓친 미묘한 감성, 빠진 것을 보조해주는 것들입니다. 작품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하고, 감동을 2~3배 늘려줄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어머니의 그림을 재발견한 것도 전시를 기획한 학예사와 연구팀입니다. 끝으로 엄마 그림을 발굴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꼭 전하고 싶습니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