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여성 폭력의 사회적 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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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희 (사)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직장 내 스토킹 끝에 여성 역무원을 살해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났다. 가해자는 이례적으로 항소심에서 1심보다 더 무거운 형량인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년 사이에도 서면 ‘돌려차기’ 사건으로 알려진 강간 살인미수 사건, 신림동 공원 등산로에서 일어난 성폭행 살인 사건 등 강력범죄가 잇따랐다. 이러한 범죄가 개인에게 끼치는 피해도 엄청나지만,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28조 5619억 원. 2011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성폭력 범죄에 드는 ‘사회적 비용’을 추산한 결과다. 범죄의 사회적 비용이란 범죄 예방에 드는 비용과 실제 범죄가 발생해 일어나는 정신적, 육체적 피해 및 재산 손실 등을 합산한 결과 비용, 형사사법기관의 수사와 처벌 과정에서 생기는 대응 비용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성폭행은 어린이 유괴 범죄를 포함한 약취유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28조 6082억 원)에 이어 두 번째로 사회적 비용이 많이 발생하는 범죄다. 한편,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2009년 가정폭력의 사회적 비용을 2조 821억 원으로 추산했으며, 2016년에는 성매매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약 10조 원가량으로 추산했다.


성폭력 사회적 비용 25조 5619억 원

범죄 피해에 대한 정부 부담 4% 불과

여성 권익 보호 위한 예산마저도 삭감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 이탈

여성 정책·국가 책임의 실종 상징

연대 나선 피해자 목소리 귀 기울이길


이런 숫자를 보여 주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여성 폭력 예방과 피해자 보호를 위한 예산 분배에 있어 국가가 책임을 다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그 차원에서 UN 서아시아경제사회위원회는 2020년 여성 폭력으로 인해 국가에 발생하는 비용과 여성 폭력이 공중 보건에 끼치는 영향을 담은 지표를 공개했다. 가정폭력, 성폭력 등으로 인해 손해 보는 연간 노동 일수는 50만 일에 달한다고 보았다. 영국의 경우 연간 대략 560만 명의 여성들이 남성 배우자 혹은 연인에게 폭행당한 경험이 있으며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230억 파운드 정도, 한화로 약 34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우리 정부는 이러한 사회적 손실을 막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다른 나라에 비해 공공 부문에서 범죄에 대응하는 비용은 현저히 적다. 앞서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보고서에서는 한국의 경우 영국이나 다른 선진국과 달리 국가가 범죄에 부담하는 비용은 대응 비용에만 치우쳐 있을 뿐이며, 예방 비용이나 결과 비용 등 전체 범죄 비용에서 민간이 부담하는 비중이 무려 96%에 달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범죄 피해에 대해 정부가 부담하는 비중이 불과 4%도 되지 않는 것이다. 10년이 훨씬 더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현 여당은 범죄 피해자 보호 지원 관련 모든 제도를 피해자 중심으로 전환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여성 폭력에 있어 범죄 피해자를 보호함으로써 여성 인권을 증진하고자 하는 정책은 여성가족부의 주요 업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부처를 통해 그나마 존재하는 공공 부문의 책임조차도 예산 삭감과 정부 정책 전반에서 ‘여성 지우기’ 가속화로 정책은 급속하게 후퇴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요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부처는 급속도로 위축되었고, 피해자 보호를 최우선으로 전담하는 여성 권익 보호 예산은 뭉텅 잘려 나갔다. 정부는 스토킹, 아동 청소년 대상 온라인 성 착취 등 신종 범죄와 복합 피해 등에 대해 보다 촘촘한 피해 지원 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지만, 청소년 지원 사업 예산 삭감,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시설 축소, 성매매 피해자 구조 지원 사업 삭감 등으로 대부분의 예산이 감액된 상황에서는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형국이다. 이러한 예산 축소는 피해자 지원 정책 전반의 축소로 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청문회장을 이탈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후보자는 여성가족부 폐지에 대한 입장에서도 ‘드라마틱하게 엑시트(exit)하겠다’고 대답하여 논란을 낳은 바 있었다. 이는 청문회 모두 발언에서 후보자가 “취약·위기 가족 지원, 청소년 보호, 아이 돌봄, 여성의 경제적 역량 강화, 5대 폭력 피해자 지원 등 국민의 삶과 밀접한 과제가 산적해 있다”며 여성가족부의 중요성을 언급한 발언과도 모순된다. 무책임한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실종은 여성 정책의 실종, 국가 책임의 실종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건 아닐까.

최근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 인천 스토킹 살인 피해자의 유가족, 일명 ‘바리캉’ 폭행으로 교제 폭력 피해를 본 피해자 등 전국 각지에서 성폭력, 스토킹 등 성범죄 피해를 본 이들이 국내 최초로 피해자 연대를 구성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정부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들이 숨지 않고 보호받을 수 있도록 적극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목소리에 응답하는 책임 있는 정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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