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매체에 의해 기억되는 역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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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경 시인

15일 동래읍성역사축제에서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를 재현한 뮤지컬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 15일 동래읍성역사축제에서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를 재현한 뮤지컬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

얼마 전에 TV 예능인 ‘벌거벗은 세계사’를 보면서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전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택한 방법 중 하나가 조선인을 잡아다가 해외 노예로 판 것이다. 그 숫자가 무려 10만이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백성이 일본과 해외에서 노예 생활을 했을까?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 주인공인 ‘쿤타 킨테’ 의 치욕스러운 역사가 흑인만의 것인 줄 알았는데 우리 민족의 역사라니, 가슴이 저리고 분노가 일었다.

여러 매체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접하면서 하나의 진실에도 여러 개의 해석이 있으며 당시의 교육 방향성에 따라 은폐되는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깨달음은 언제부터인가 교육현장에서 대학 진학에 유리한 영어, 수학, 국어, 과학 등만을 중시하는 세대들의 역사의식은 어떨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지식과 정보가 쏟아지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선택에 의한 지적인 편중은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이 몸담아 있는 나라의 역사에 무관심한 것은 문제가 있다. 치매에 걸린 ‘나’가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듯 내 나라의 역사를 모르는 것은 기억을 잃은 자와 다름이 없다.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기억하기란 주체의 깨달음이 침투해 있는 어떤 과정”이다. 매체라 할지라도 이를 통해 접하게 되는 한국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깨닫게 하는 기억하기의 일종이다.

한국사 올바르게 기억하는 일

국민 정체성·주체성 깨닫게 해

다양한 매체 통한 역사 교육 유행

일부 예능서 오류·왜곡 발견되기도

역사적 시각의 객관화 필요한 때

‘매체를 통한 기억하기’는 역사를 흥미롭게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당시의 위정자에 의해 이미 왜곡되었을 수도 있지만 기초적인 역사 지식을 쌓고, 여러 시각이나 가치관으로 해석한 역사들을 접한다면 전후 맥락을 살펴 현실의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혜안을 갖게 될 것이다. 사회적 텍스트로서 매체의 내용들은 교육현장을 통해서 고착화된 역사적 사고를 유연하게 할 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각을 넓혀 준다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내용들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 등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각색하고, 역사 토크쇼 등의 예능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역사학자보다는 입담이 좋은 인기 강사를 선호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역사적 진실보다는 시청률을 우선순위로 두는 방송의 특성으로 인해서 잘못된 사실의 전달이나 오류를 범할 때도 있다. 2020년 ‘벌거벗은 세계사’의 강연자인 설민석의 역사 왜곡 논란은 단편적 역사 해석이나 오류를 보여 준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초적인 역사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 왜곡된 역사의식을 심어 준다.

매체에 의한 기억은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요즘 언론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위안부나 건국 시점의 논란은 원하지 않아도 기억되는 역사적 사실들이다. 식민지 시대를 근대화의 초석이라 보는 뉴라이트 계열의 사람들은 건국 시점을 광복절로 보고 있는 반면 항일 운동사를 대한민국 근간으로 보는 민족주의 계열의 사람들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을 건국 시점으로 보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역사를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을 두고 잘못된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이런 논란이 역사학자가 아니라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의해 주장된다는 점이다. 이분법의 논리로 양분화되어 있는 사회적 현실로 인해 우리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역사적 해석에 동조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처해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 교과서가 개편되고, 나라의 정체성과 주체성이 양분화되어 있는 이런 현실은 미래의 주역인 세대들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대중매체에 의해 역사가 기억되는 일은 이제 일상이다. 역사적 사실의 홍수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우리 국민의 몫이다. 다양성과 여러 가치관이 인정되는 글로벌 시대이지만 내 나라의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일만은 미루어서는 안 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역사적 시각의 객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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