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병원 참사’에 국제사회 요동… 전쟁, 앞이 안 보인다
병원 폭격 ‘전쟁범죄’ 수백명 희생
국제적 공분 세계 곳곳 시위 확산
중동 정상, 바이든 회동 약속 취소
바이든 중재 노력 시작부터 꼬여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병원에서 발생한 대폭발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이 ‘시계제로’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지상군 투입 임박’ 상태로 지상전 개시를 일주일가량 저울질 해온 이스라엘 또한 개시 결정을 내리는 일이 더욱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스라엘·이슬라믹 지하드 네탓 공방
AP, AFP,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17일(현지 시간) 오후 가자시티의 알아흘리 아랍병원이 폭격을 받아 수백 명이 숨졌다.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지구 보건부는 이날 오후 수백 명이 다치고 수백 명의 희생자가 아직 건물 잔해 밑에 있다고 밝혔다. 폭발 이후 보건 당국자들은 사망자 수가 500명이라고 밝혔다. 희생자 대다수는 여성과 어린이, 피란민으로 알려졌다.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가산 아부 시타 박사는 영국 스카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수술 중이었다. 강한 폭발이 일어나더니 수술실 천장이 무너졌다”며 “이건 학살”이라고 말했다. 병원 폭격 후 국경없는의사회는 성명을 내고 “병원과 수많은 환자, 의료 종사자, 피난처를 찾는 사람들에 대한 이 충격적인 공격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폭발 사실을 발표한 가자지구 보건부는 이스라엘 공습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책임을 부인하며 팔레스타인의 또 다른 무장정파 이슬라믹 지하드의 로켓 실패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군 수석 대변인인 다니엘 하가리 소장은 성명을 통해 “분석 결과 가자지구 내 테러리스트들이 일제 사격한 로켓들이 알아흘리 아랍 병원이 폭발했을 때 병원 아주 가까운 곳을 지나간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또 여러 곳에서 나온 정보에 따르면 이슬라믹 지하드가 병원 인근에서 로켓을 일제 사격한 것으로 확인돼 사건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감청을 통해 이슬라믹 지하드 대원들이 이번 사건이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음성 녹음을 확보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슬람 지하드 측은 로이터통신에 “거짓말이자 날조이며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며 “점령군(이스라엘군)은 민간인을 상대로 저지른 끔찍한 범죄와 학살을 은폐하려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미국 정보 당국은 관련 정보를 분석 중이라고 미 CNN방송이 전했다.
■시계제로…바이든 노력 ‘반쪽’ 전락
책임이 어느 쪽에 있든 전쟁에 가장 취약한 민간인·환자들이 보호받던 의료시설에서 수백 명이 사망한 참사로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은 중대 기로에 놓였다. 아랍·이슬람권이 격앙된 만큼 확전 위기가 고조될 전망이다.
당장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요르단 방문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수반, 이집트 대통령을 포함한 4자 정상회담 계획이 이례적으로 목전에서 취소됐다.
영국 BBC 방송은 “아랍 국가들이 바이든 대통령과의 회담을 취소하는 것을 손쉽게 생각하고 있다”며 “몇 년 전만 해도 아랍국가들이 미국 대통령에게 이렇게 큰 거부를 할 용기가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만큼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BBC는 “바이든 대통령이 '중동의 선량한 중재자'처럼 보이려고 했다가 망신에 직면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바이든 대통령은 이스라엘만 방문한다.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팔레스타인과 주변국 설득을 위한 계획이 무산된 상황에서 이스라엘 설득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처지가 됐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가는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 안에서 기자들과 만나 바이든 대통령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만나 “어려운 질문들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이 곧 가자지구에 지상군을 투입한다는 관측과 관련해서는 이번 참사로 이스라엘이 더 강하게 견제받을 가능성도 있다.
■국제사회 경악… 시위 확산
책임 소재와 관계없이 민간인 수백 명이 폭격 속에 숨진 전쟁범죄 정황에 국제사회가 강력히 규탄하고 나섰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엑스를 통해 “팔레스타인 민간인 수백 명의 죽음이 경악스럽다.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며 “병원과 의료진은 국제 인도주의법에 따라 보호 대상”이라고 강조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아랍에미리트(UAE)와 러시아의 요구로 18일 긴급회의를 소집해 가자지구 병원 참사를 논의할 예정이다. 중동 이웃국들을 포함한 이슬람권은 폭격에 대한 가자지구 당국의 발표가 보도된 직후부터 분노를 표출하고 나섰다. 요르단 외무부는 병원 폭발에 대해 “이스라엘이 이 심각한 사건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고, 카타르 외무부는 이번 폭발을 “잔인한 학살이자 무방비 상태 민간인에 대한 극악무도한 범죄”라고 비판했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가자지구의 병원에서 팔레스타인 부상자들 위로 떨어진 미국·이스라엘 폭탄의 화염이 곧 시오니스트(유대 민족주의자)들을 집어삼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통치하는 요르단강 서안의 곳곳에서는 시위대와 팔레스타인 보안군 간 충돌이 빚어졌다. 요르단 암만에서 분노한 시위대가 이스라엘 대사관 급습을 시도했고, 튀르키예와 튀니지 주재 서방 국가 대사관이나 이라크, 리비아 도심과 광장 등지에도 시위대가 몰려들고 있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